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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lmost there

마음가짐

by Cool K


Lake isabella..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런 마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었는데, 요 며칠 이 마을의 이름을 수십 번도 더 부르면서 마치 우리 집 옆동네인 듯 익숙해진 것 같았다. 야속하리만큼 뜨거운 사막의 태양을 내리쬐다 보니 시원한 샤워 후에 마시는 맥주 한잔의 여유가 너무도 절실했었기 때문이다.


이전 보급지인 'Hiker town'에서 상기형과 통화를 했을 때, 'Lake isabella'에는 형이 몇 년 전 PCT 종주를 도와드렸던 '우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시다고 했다. 우 선생님께서 그곳에 온천을 가지고 계시니 한 며칠 쉬었다 가는 것도 좋을 거라고 하면서 같이 가보자고 이미 약속을 한 상태였다.


'Lake isabella'로 빠질 수 있는 'Walker pass campground'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경. 상기형과 이 곳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9시. 시간이 많이 남아서 먼저 히치하이킹을 해서 마을에 가 있을까도 했지만, 운좋게 Campground에서 만난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께서 자신의 집에서 씻고 하루 머물다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 곳까지 함께 한 Kate와 Boon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흔쾌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물론 나는 약속시간까지만 함께 하기로..





DSC01196.JPG < 안락하게 보이겠지만, 밀폐된 공간에 많은 수의 하이커들이 모이게 되는 순간 생전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경험해 볼 수가 있다. >





Campgroun에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한 아주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부터 꺼내 주셨다. 마치 할머니한테 막대사탕을 받고서는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들처럼 너도나도 웃통을 벚어젖히고는 환호를 지르며 건배를 외쳤다. 여자 세명을 포함해서 총 9명이었기에 우리는 샤워 순서를 정해야만 했다. 물론 매너 있게 'Lady first'. 남은 남자 6명의 순서는 나이순으로 정했는데, 첫 번째는 의심할 것 없이 가장 연장자인 'Speed', 놀랍게도 그다음이 바로 나였는데, 나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아 보이던 Boon이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친구였다는 것이 가장 충격이었다. 말도 안 돼! 나도 한국에서는 어리게 봐주는 경우가 드문데, 정말이지 이 친구들 나이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서까지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는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아 게임을 했다. 각자 유명인사의 이름을 세장씩 적어내고 편을 나눠 한 명씩 뽑은 종이에 적힌 사람에 대해 설명을 하고 맞추는 팀이 점수를 얻는 게임이었는데, 미국의 유명인사라고는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만 알던 나로서는 이들이 적어낸 이름을 눈으로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낄 수가 없었다. 나이 든 어른들이 이런 단순한 게임 하나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고 즐길 수가 있다는 게 이 길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 것 같았다. 나이나 피부색, 종교 등을 떠나 그냥 같은 길을 걷는 하이커로 차별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웃고 즐기는 사이, 상기형과 약속한 시간이 되어 나는 먼저 자리를 일어났고 Kate와는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포옹을 나눴다.





KakaoTalk_20160905_184804593.jpg < 단순한 게임 일지라도 이기고 지는 것에 목숨거는 건 애나 어른이나, 우리나 서양애들이나 마찬가지였다 >





약 20일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상기형은 약속한 시간에 형수님과 함께 도착했고, 우리는 말없이 뜨겁게 잡은 두 손으로 반가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나누었다. 일전에 '우 선생님'의 PCT를 도와주신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Campground에서 하루 묵고 가는 하이커들을 위한 Trail magic으로 신선한 과일들을 테이블 위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기형의 도움으로 또 한 번 다른 하이커들 보다 더 풍족한 휴가를 얻게 된 나는 마을에 위치한 '우 선생님'의 온천에 짐을 풀었고, 그간의 피로를 풀기 위해 우선 뜨거운 유황온천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만나 뵙고 싶었던 '우 선생님'은 이 곳에서 세네 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집에 머물고 계셨기에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다시 트레일로 복귀하기 전에 꼭 뵙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오늘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뜨거운 온천 후에 즐기는 얼큰한 감자탕,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한잔의 술. 머나먼 타국에서도 한국의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원 없이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속 시원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가장 큰 기쁨이었다.






KakaoTalk_20160905_184708062.jpg < 짧은 휴가지만 시간을 내어 이 길의 시작을 도와주신 주영선배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라기보단 삼겹살이 먹고 싶었다 >






Lake isabella의 온천에서 시작해서 주영 선배님 댁 까지 들렀다 돌아온 짧고 굵었던 사흘간의 휴가는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치 군대 백일 휴가를 나왔다 복귀하는 기분처럼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물론 좋은 분들과 한국음식으로 원기회복도 했고 필요한 장비도 재정비를 할 수 있었지만, 헤어짐이라는 게 늘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우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처음 뵙는 자리였지만, 같은 길을 먼저 걸으셨고 또 지금 내가 걷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선생님과 나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 당시 일 때문에 캘리포니아 구간만 걷고 그만 두실 수밖에 없으셨지만, 아쉬움이 남아 결국은 다시 차를 몰고 알래스카까지 혼자 여행하고 오셨다는 나이를 무시하는 체력과 선생님의 열정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두려워하지 말고 즐겨라. 그냥 그 순간을 즐겨.




해결할 수 없는 이 길 이후의 일에 대해 고민한다던지, 무언가 이 길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써 노력하지 말고 오늘이 지나면 되돌릴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는 '우 선생님'의 말씀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즐기다 오자는 다짐을 수도 없이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이 길을 걷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하지?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답을 찾을 수도 없는 물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떨쳐내고자 했던 두려움은 끈질기게도 어디엔가 붙어 다시금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서른여섯, 가장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해야 할 나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밖에 없는 두려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이 길에서 만큼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세상에서의 희로애락에 충실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트레일로 복귀하는 날은 선생님과 마을에 있는 한 식당에서 푸짐한 하이커 메뉴로 거하게 아침식사를 한 후 여유를 가지고 출발을 했다. 가는 길에 히치하이킹을 하는 하이커들을 태워서 함께 가기도 했는데, 매번 얻어 타는 입장에서 태우는 입장이 되어보니 왠지 기분이 묘하면서도 뭔지 모를 뿌듯함 느껴졌다. 트레일로 복귀할 수 있는 'Walker pass campground'에 도착해 몸 건강하라고 웃으시며 손을 흔드시는 '우 선생님'을 향해 꼭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과 깊은 감사를 담은 인사를 드리고는 다시 트레일에 발을 내디뎠다.





KakaoTalk_20160905_184708352.jpg < 친근한 이미지의 '우 선생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신 분이라 혼자 여행도 많이 다니셔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지루 할 틈이 없었다. >





오전 11시. 역시나 뜨거운 태양은 시원했던 휴가의 청량감을 금세 익혀버렸다.

몸에 딱 맞춘 프레임이 있는 새 배낭 덕분에 어깨는 아프지 않았지만, 이번엔 트레킹 폴이 없어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기존에 사용하던 트레킹 폴이 닳아 새 걸로 바꾼다고 하는걸 깜박하고는 놓쳐버렸다. 다음 보급지의 하이커 박스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오긴 했지만, 내심 불안하긴 했다. 하루 이틀 걷는 트레일이 아니기도 하고, 혹시나 무리해서 다리가 아프기라도 하면 낭패이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무리가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매일 같은 풍경의 사막 구간도 조금씩 질리기 시작했다. 흙, 바람, 태양,.. 가끔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에서 보내는 휴식. 사막 구간을 걷는 일상은 매일매일 똑같았다. 걷고 쉬기를 반복하고, 가장 뜨거운 정오에는 낮잠을 자기도 하고,.. 처음 이 길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는 같은 사막일지라도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생소한 풍경에 '와~ 와~'하고 연신 감탄을 하기도 했는데, 어느덧 걷기 시작하고 한 달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고 익숙해지는 만큼 사막의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길고도 길게 느껴졌던 사막 구간이 끝나고, 꿈에 그리던 시에라 구간에 접어든다는 것. 다음 보급지인 'Kennedy meadow'는 그 시에라 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었다. 영화 'Wild'에서 셰릴의 도착을 환호하며 음료를 권하던 그 장소가 바로 'Kennedy meadow'였다.


아침을 거하게 먹어서인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면 힘이 들어지기에 새로운 메뉴로 준비한 토르티야에 참치를 곁들여 먹었다. 결과는 실패. 드레싱이 없는 그냥 참치라 그런지 너무 퍽퍽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마요네즈만 있었어도 먹기는 먹었을 텐데, 미국애들은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그리 잘 먹는지 그 모습에 속아 식량을 준비한 내가 바보였다. 다 경험이라 생각하고 이런 일은 빨리 잊는 게 정신건강에 유리했다.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 늘 먹던 육포 몇 조각을 입에 구겨 넣고는 다시 길을 걸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오래 쉬었던 만큼 20mi 정도는 걷고 싶었다.




DSC01193.JPG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없는 사진으로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저 길 위에 서있기라도 한다면 금새 땀으로 젖고 있는 옷의 무게를 느낄 수가 있게 된다. >






사막의 밤은 낮과 다르게 쌀쌀했다.

땀에 젖은 옷이 바람에 스치면서 더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해가 지는 사막에서 오랜만에 텐트를 치는 내 모습이 어색하고 침대에서 자다 다시 텐트에서 잘 생각을 하니 애처롭기도 했지만, 이 주변에서 이만한 잠자리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만은 편안해졌다.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요, 내가 자는 곳이 내 집이니라.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이야기처럼 이것 또한 내 마음가짐 아니겠는가?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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