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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lmost there

Bye Desert! Welcome Sierra!

by Cool K




"후~ 영 힘이 안 나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오른 길을 뒤 돌아보며 혼자 읊조렸다. 시작부터 오르막을 오르고 나니 심장과 허벅지가 터질 것만 같았다. 트레킹 폴이 없어서 어색하기도 했고, 체중과 배낭의 무게를 두 다리로만 견뎌내야 했기에 이전보다 힘이 더 드는 건 당연지사. 'Kennedy meadow'까지 오늘 도착하기 위해서는 약 30mi을 걸어야 했다. 굳이 오늘 도착할 필요는 없었지만, 'Kennedy meadow'는 다른 보급지와는 달리 시에라 구간의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내심 빨리 도착하고 싶었다.


어제저녁도 대충 단백질 셰이크로 때우고, 아침도 견과류로만 먹어서인지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배가 고파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다. 휴가 때 사온 신라면이 먹고 싶어서인지도,.. 스웨덴의 '쿵스레덴'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한국사람에게는 김치 다음으로 필요한 게 아마도 라면이지 싶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도 않더라. 라면 하나로는 부족할 거 같아 알파미랑 섞어서 한 끼 거하게 먹고 나니 속에서 열도 나고 생기가 도는 듯했다. 역시 비싼 건조 식량 보다도 내 입맛에는 라면밥이 딱이었다.


갈 길도 멀고 해서 무리를 좀 하기로 하고는 쉬지 않고 걸었다. 평소 같으면 해가 뜨거운 정오 시간에는 낮잠도 잤을 건데 오늘은 패스를 했다. 오늘이면 다시 못 볼 사막이라 생각하니 황량한 땅 위의 초목들도 이쁘게만 보였다.


'그래. 내가 언제 또 이런 황량한 사막을 걸어 보겠어?'


내딛는 한발 한발 오래 기억하고 싶어 꾸욱 꾹 더 힘을 주고 걸었다. 이른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말짱하던 하늘이 심상치가 않았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고, 구름 뒤로 해가 숨을 때가 점점 잦아졌다. 물론 이런 날씨가 걷기에는 훨씬 좋긴 하지만, 만약 비라도 내린다면 몸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제발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비는 좀 참아라..'


야속하게도 하늘은 점점 더 시꺼메져만 갔고, 아침부터 지나가는 하이커를 한 명도 볼 수가 없어 그런지 황량한 이 길이 음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DSC01203.JPG < 이런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껏 투덜거렸던 내 자신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몸이 제 컨디션을 찾았는지 다행히 무리 없이 해가 지기 전에 'Kennedy meadow'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영화에서 봤던 목조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 곳에 오기까지 비를 내리지 않아 준 하늘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와우~!! 해냈어 친구!! 어서 와~"


건물 앞에 다다르자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많은 하이커들이 다 같이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해주었다. 뜨거운 환대가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태연한 척 엄지를 들어 그들에게 화답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뜨겁게 느껴졌다. 영화에서만 봐왔던 장소에 내가 직접 서있다는 것과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며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1,100mi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왔다는 게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감상도 여기까지, 곧 내릴 것만 같은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텐트를 쳐야만 했다. 건물 뒤쪽으로 나있는 공터 빈 곳에 공짜로 야영을 할 수 있었기에 그곳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쿨케이!! 헤이 이제 왔구나. 우리가 해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영어가 안 봐도 'Sketch & Tony'였다. 'Tehachapi' 이후로 처음 보는 거라 오랜만이기도 했고, 어눌하지만 쉬운 영어로 대화가 잘 통하는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나니 진심으로 기뻤다. 영어가 잘 안 되는 Tony는 여전히 전매특허인 하회탈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었고, 리액션이 과한 Sketch와는 약 3초간 깊은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이번이 세 번째 보는 것이었고, 이렇다 할 관계도 없었지만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 온 이 친구들이 나는 좋았다.


Sketch의 텐트 옆에 잠자리를 만들어놓고는 보급품을 찾아오는데 어디선가 눈에 익은 얼굴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독일에서 온 NG였다. NG는 키 큰 Kate와 함께 'Wright wood' 전까지 동행했었던 여성 하이커. 그녀와 함께 동행하던 Kate는 남편과 함께 Wright wood까지만 진행을 하고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한두 번 같은 곳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식사하며 얘기 나눈 게 다였지만,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또 눈이 파란 친구들과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 길이 고맙기도 했다. NG 말고도 'Big bear'의 'Papa smurf'의 집에서 함께 머물던 Mickey mouse 등 여러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가 있었고, 서로를 축하해주며 길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DSC01207.JPG < 시에라 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Kennedy meadow'. 사막구간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맛보며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의미가 남다른 보급지이다. >


DSC01228.JPG < 흥겨운 음악과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는 'Kennedy meadow'. 맥주는 물론 안주와 간단한 식사거리도 상점 옆의 작은 식당에서 사먹을 수 있다. >





Sketch는 트레일 네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을 그리는 친구였다.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이 친구는 독특하게 펜만으로 그림을 그렸고, 취미로 그린 것 치고는 실력이 상당했다. PCT를 하면서 그렸다는 그림을 하나씩 보다 보니 앞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시에라의 풍경이 담길 그의 스케치북이 점점 기대가 되었다. Tony는 정말 용감한 친구였는데, 용감하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결혼 한 지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혼자서 6개월의 여정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이었다. 그게 가능하냐고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나를 보고 해맑게 웃으면서, 결혼 전부터 자기는 꼭 올해 이곳에 가야만 한다고 말을 했었고 결국 승낙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세상에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혼을 하고도 이런 짓을 용감하게 저지를 수 있는 Tony와 그런 그를 순순히 보내주는 그의 와이프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랬던 삶을 이 친구는 살고 있는 것이라 그런지 웃기만 하는 Tony가 새삼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Kennedy meadow'의 밤을 가득 메웠고, 때마침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는 마치 흥을 돋우는 북소리만 같았다. 그렇게 뜨거웠던 우리의 사막 이야기는 이제 추억이 되어 밤과 함께 깊어져만 갔다.





DSC01213.JPG < Sketch가 그린 멕시코 국경 출발점에서의 자화상. >





전날 마신 맥주 때문인지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자제를 했어야 했는데 흥에 겨운 나머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아픈 머리를 흔들며 전날 찾아온 보급품 정리를 하려고 들었는데 무게가 상당히 나갔다. 계산을 해보니 다음 보급지인 'Mammoth lake'까지는 약 330mi의 거리. 하루에 30mi씩 걷는다 치고 11일 치 식량을 준비한 것이었다. 중간에 'Bishop'이나 'Lonepine'으로 빠질 수도 있지만, 그곳은 히치하이킹을 하기가 좀 까다로웠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다음 보급지까지 가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거기에 이 구간부터는 필수로 가지고 다녀야 할 곰 통의 무게까지 합하면 식량 무게만 약 6킬로는 족히 될 것만 같았다. 트레킹 폴도 이곳에서 찾아보려 했지만 마땅히 쓸만한 게 없어 다음 보급지에서 구해야만 했는데, 스틱 없이 이 정도 무게로 시에라 구간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겠는가, 다 내가 결정하고 행한 일인데 책임도 내가 질 수밖에.


앞으로 열흘 동안 짊어져야만 하는 인생의 무게에 한탄하고 있는데, 한 하이커 무리가 우리 쪽으로 와서 말을 건넸다. 'Sketch & Tony'와는 전부터 알고 지냈는지 반갑게 인사하면서 오늘 밤 파티를 할 거니 오라고 초대를 했다. 그들은 'Shade & Pogo' 형제로 함께 다니는 Sticks, Poet과 이곳 인근에 있는 'Kennedy meadow Campground'로 자리를 옮겨 하루 더 지내면서 파티를 할 거라고 했다. 자신들을 위해서 달려와준 여자 친구들과 함께!!


부러웠다. 너무나도 부러웠지만 내색하긴 싫었다.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우리를 보고 여자 친구들은 오늘 저녁에 돌아갈 거니 신경 안 써도 된다면서 꼭 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쿨하게 가던 길을 갔다. Sketch는 좋은 친구들이라며 하루 더 쉬고 내일 같이 출발하자고 우리를 설득했고, 내심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고 있었던 나는 흔쾌히 오케이 하고는 짐을 꾸렸다. Shade가 얘기한 'Kennedy meadow Campground'는 약 3mi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지만 다행히 진행해야 할 트레일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마실 맥주 정도는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아서 한팩씩 손에 들고 약속한 사이트로 신나게 달렸다.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는 'Shade & Pogo' 형제와 여자 친구들은 배낭을 내리자마자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와 함께 싱싱한 야채를 곁들인 핫도그를 준비해주었다. 굳이 말을 안 해도 배가 고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다른 무엇보다도, 형제가 함께 이 길을 걷는다는 게 너무 보기가 좋았다. 나도 형이 있지만, 아직 둘이서 1박 2일 이상의 여행을 다녀온 적은 없었다.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걷는 길 위에서 이들은 얼마나 많은 추억을 서로 간직하게 될까? 아마 이 형제는 평생을 잊지 못할 추억을 함께 공유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괜히 형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한 살 터울인 우리 형제도 어렸을 땐 많이 싸우고 지냈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같은 과로 진학하면서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애가 더 두터워졌다. 비록 지금은 서로 먹고살기 바빠서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가족이라는 건 함께 일 때 더 의미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자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한 무리의 하이커들이 이곳을 찾았다. 다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오늘 이곳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는 이들을 우리는 환대해주었다. 아마도 신이난 Shade가 여기저기 다 얘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다. 여자 친구가 떠난 자리가 아쉬운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우리는 남은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먹고 마시며 한 시간을 열 시간처럼 즐겼다. 프리스비를 이용한 술 마시기 게임을 할 때는 정말이지 배꼽이 떨어져 나가는 걸 모를 정도로 웃기도 했다. 트레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웃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DSC01251.JPG < 마땅히 즐길거리가 없는 이 곳에서 프리스비는 단일 아이템으로는 아주 훌륭한 퍼포먼스를 내곤 한다. >





새로 온 Alpaca, Hoho, Chicory.. 그리고 Shade 형제 패거리들..

오늘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지만 이미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껴진 그들과의 시간은, 앞으로 이 여정이 끝나고 나서도 사진 한 장만 봐도 지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추억이 될 것 같았다.




혼자 왔지만 혼자가 아닌 시간들,..


외롭지 않은 이 길 위에서 난 오늘도 웃으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 길 위에 놓여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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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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