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덥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서자마자 후끈후끈한 열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습하지 않아 그늘에서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국보다 이른 더위에 숨이 턱 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잠시 그늘에 앉아 장장 14시간을 참은 담배를 꺼내 물고, 폐 깊은 곳으로 연기를 끌어들였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손끝까지 감각이 되살아 났다. ‘괜찮아…이제 이것도 트레일 안에서 끊을 테니까..’ 헛된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빵빵!’
우람한 차체 만큼이나 우렁찬 클랙슨 소리와 함께 하얀색 도요타 툰드라 한대가 내 앞에 섰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 짙은 선글라스로 반쯤은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캐주얼 한 복장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젊어 보이셨다. 제로그램의 이현상 대표님을 통해 소개받아, 내가 여기 미국 LA까지 올 수 있도록 현지에서 많은 도움을 주실 이주영 선배님과의 첫 조우였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하 PCT)을 올해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하기 시작했던 약 2개월 동안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만 했다. 국내에는 관련된 정보가 없어 GOOGLE을 통해 현지의 하이커들이 올려놓은 정보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고, 첨엔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워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정보를 모으다 보니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PCT ASSOCIATION(PCTA)의 공식 사이트부터 개인이 만든 PCT 관련 사이트들을 통해 많은 소스를 얻었고, 이미 종주했던 많은 하이커들이 추천한 책을 아마존이나 기타 사이트에서 주문하기도 했다. PCT 관련 서적은 그 종류가 어마어마했다. 가장 기본적인 섹션 별 지도부터 트레일 마지막 지점까지의 데이터를 정리한 데이터북, 나는 그중에서 가장 많은 하이커들이 추천한 ‘YOGI`S BOOK’을 통해 트레일과 마을정보, 중간 보급지 및 보급 관련 TIP 등을 사전에 참고할 수 있었다. 또 기타 사이트들을 통해 총 일정을 일일 진행거리에 따른 일자별 도착위치를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했고, 트레일 맵이나 데이터도 확인할 수 있었다.
<YOGI`S BOOK. PCT를 준비하기 위한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이드북>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Youtube였다. 이미 완주한 하이커들이 올려놓은 동영상을 통해 트레일의 환경을 사전에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이 사용한 장비도 엿볼 수 있었다.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의 주관적이고 솔직한 리뷰들을 통해 어떤 장비들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매일 밤 동영상을 보다 잠이 들 정도로 PCT로 검색해 나오는 동영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곤 했었다.
지금이야 쉽게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반면 PCTA로부터 퍼밋을 받는 것과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등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뭐 하필 내가 비자 인터뷰받기 바로 전 날 벌어진 리퍼트 미 대사 피격사건 때문에 긴장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나를 인터뷰 한 친구가 이 PCT에 대해 알고 있어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식량보급에 대한 부분이었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그것도 1~2주 정도가 아니라 완주까지 4~5개월 정도 소요되는 트레일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의 지원이 절실했다. 이유인즉, 총 24회로 나눠 보급해야 하는 식량을 한국에서 보내려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 미국에서 트레일 시작 전 다 보내려고 하니 각 보급지에서 소포를 보관하는 기간이 제한되어 있어 불가능했다.
이 답답함을 한방에 해결해 주신 분이 바로 이주영 선배님이셨는데, 선배님을 소개받고 나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선배님은 캘리포니아주의 PLACENTIA라는 곳에 살고 계셨고, 그곳은 위치상으로 PCT를 지원하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정작 소개해주신 이현상 대표님은 배가 아플 수 있으셨겠지만, 나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던 것이다. 왜냐면 대표님이 PCT 진행하실 때 꼭 도와 주신다고 하셨던 분이 선배님 이셨는데, 그 카드를 나에게 양보하셨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분들께서 이번 여행을 위해 도움을 주셨고, 그 덕분에 흡족할 정도로 사전 준비를 다 마칠 수 있었다. ZEROGRAM, 익스페디션 코리아, ALTRA, 파커스 인터내셔널, CAMELBAK 등 많은 브랜드에서 지원을 해주셨고, 뿐만 아니라 동생이 먼 길 간다고 정을 모아 챙겨주신 형님, 누나들.. 본인의 배낭까지 메어준 슈렉형까지…
비록 앞으로 내가 이 분들께 이 은혜를 갚을 수는 없어도, 후배들이나 나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꼭 갚을 거란 다짐을 했다.
다소 어색한 첫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LA공항에서 선배님이 살고 계신 PLACENTIA으로 이동하였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기도 했고 장시간 비행기도 타고 와 배가 살짝 고팠는데, 어찌 아셨는지 선배님은 LA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KING TACO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마 어색해하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 그러신 건지도 모른다. 다른 TACO브랜드와는 달리 한국인의 입맛을 자극하는 특제 소스가 있다는 KING TACO. 힐러리도 LA에 오면 꼭 먹고 간다는 선배님의 극찬처럼, 한입 베어 문 KING TACO의 브리또는 기내식의 느끼함과 우리 둘 사이의 어색함을 씻어내기 충분했다. 엄청나게 매운 소스였지만, 매운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어색함을 씻어 낸 후, PLACENTIA로 이동해 선배님 댁 근처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도 선배님이 나를 위해 미리 예약해 주셨고, 미국이 처음이라 한창 긴장해 있을 나를 위해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인근 마트에 들려 즐겨 드신다는 맥주까지 챙겨 주셨다.
분에 넘치는 선배님의 사랑과 함께… 그렇게 미국에서의 첫날은 아무 탈 없이 부드럽게 지나갈 수 있었다.
이튿날,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오신 선배님께서 TRAIL ANGEL 경험이 있다는 분을 소개해주셨다. 선배님의 소개로 처음 만난 상기 형은 나하고 나이 차는 그리 많이 나지 않지만, 미국에 산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고 2012년도에 지인 분의 PCT종주를 도와주신 경험이 있었기에 PCT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 준비를 다 마치고 왔지만, 형의 출현으로 실질적인 정보를 사전에 많이 얻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이후 우리는 약 2일의 준비기간 동안 호텔을 베이스캠프로 두고, 식량 및 장비 구입을 위한 쇼핑을 하며 트레일 준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텔에서 잠시 쉬면서 장비를 살펴보다가 120L 더플백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내 짐을 보고 깜짝 놀라 다 버리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워낙 장거리 트레일이라 무게가 관건이었는데, 욕심을 못 버린 탓인지 내가 준비한 기본 장비는 너무 무거웠다. 욕심의 무게가 트레일 위에서 나를 힘들게 할 것이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가지고 온 장비들 중 겹치거나 일부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장비를 내려놓기도 했지만, 식량을 제외 한 내 기본 장비의 무게는 여전히 무거웠다. 더 내려놓아야 했지만, 나름 최선이라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실제 이전 스웨덴에서 약 한 달 간 ‘KUNGSLEDEN’을 걸을 때의 배낭 무게, 25KG에 비하면 이건 무거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량 대부분은 건조식으로 구성하였다. 무게, 맛, 칼로리 삼박자를 다 맞추기 위해서 비싸더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MOUNTAIN HOUSE>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 자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전의 해외 원정이나 한국에서의 경험치들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란 나의 자만이 스스로를 무너뜨릴 거라는 것을 솔직히 그때는 몰랐다.
PCTA에서 주최하는 KICK-OFF에 참가하기 위해 LAKE MORENA로 떠나야 하는 마지막 날, 선배님 댁의 차고에서 보급지 별로 보낼 식량을 미리 꾸렸다. 내가 트레일로 떠나고 나면 차례대로 선배님께서 보내주시기로 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혼란스럽지 않도록 각 보급지 별로 순번을 매겨 놓고 박스에도 체크를 해두었다. 세 번째 보급지까지는 우체국에서 미리 보내 놓기도 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쉬고 있는데, 먼 길 가는 후배를 위해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먹이고 싶다는 선배님의 말씀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 날 저녁, 형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함께 식탁에서 먹는 저녁은 마치 한국에서 먹는 듯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어쩌면 다시는 이런 정 가득한 따뜻한 밥을 못 먹을 거란 생각에… 밥을 두 그릇이나 깨끗이 비웠다.
<미국 우체국의 PRIORITY MAIL SERVICE를 이용하면 무게 상관없이 박스 크기 별로 정해진 금액만 내고 미국 전역으로 보낼 수 있다>
이제 모든 게 다 준비는 되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준비했고, 또 그만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감사한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 더니, 마치 반을 걸은 것만큼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내가 만들어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 길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 건지는 오롯이 내 몫인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
하지만 그 길도 내가 걸을 길.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