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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Sep 12. 2016

가깝고도 먼 당신.. 'Mt. Whitney' (2)



 "지금이야 Sketch! 가자!"


 짙게 드리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Mt. Whitney'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급히 Sketch를 향해 소리쳤다. 그때가 벌써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날씨 때문에 텐트로 돌아오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Tony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Tony는 우리를 보자마자 가쁜 숨을 내쉬며 힘들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그가 내민 카메라에 찍힌 'Mt. Whitney' 정상의 모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화이트 아웃에 힘들게 웃고 있는 Tony의 얼굴뿐이었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정상을 오르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그냥 속시원히 포기하기로 했다. Tony가 자신의 텐트로 돌아 간 후 우리도 철수를 위해 텐트를 걷고 짐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끝내 미련이 남았는지 아쉬움에 자꾸만 'Mt. Whitney'가 있는 곳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보라라도 치는 듯 짙은 안개로 가려져 있던 정상 부분에 서서히 빛이 비치면서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만약 상황이 이대로 좋아지기만 한다면 지금 출발해 우리가 정상에 오를 때쯤에는 그토록 바라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급히 Sketch를 불렀던 것이다. 갑자기 소리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지 어리둥절 하던 Sketch는 내가 응시하는 곳을 따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배낭을 풀고는 산행에 필요한 짐만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 거짓말처럼 맑게 갠 하늘. 이틀을 기다린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정상을 향해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구름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정상까지는 약 6mi의 거리.

 하지만 고도를 10,000ft나 올려야 했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거리였다. 더구나 이미 오후 1시 반이 넘어 서둘러 오르지 않으면 하산할 때 해가 져 위험한 상황에 맞닥트릴 수도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고 거친 숨을 내쉬며 지그재그로 높게 뻗어 있는 길을 한발 두발 오르고 또 올랐다. 속도가 점점 쳐지던 Sketch가 잠시만 쉬어간다고 하길래 정상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계속 걸었다. 나는 예전부터 산을 오를 때 잘 쉬지 않는 편이었다. 중간에 앉아서 쉬게 되면, 쉴 때는 편하고 좋지만 다시 출발할 때는 처음 산행할 때와 같이 몸이 덜 풀린 느낌이 들어 오히려 안 쉬고 그냥 천천히 걷는 게 더 편했다. 속도를 조절하며 최대한 땀이 나지 않도록 재킷의 벤틸레이션을 열고 닫았다. 아무래도 고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만큼 옷이 땀에 젖게 되면 자칫 저체온증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귀찮아도 최대한 조심을 해야만 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스위치백이 시작되기 전 지나온 호수들이 주먹만 하게 보이는 걸 보니 꽤 올라온 듯했다. 허기가 느껴져 행동식으로 가져온 믹스넛을 한 움큼 입에 물고도 모자라 사탕과 초콜릿을 더 꺼내 먹었다. 앞서 다녀온 하이커들의 말대로 중간중간 가파르고 좁은 길에 쌓인 눈이 얼어 미끄러운 구간이 많았는데, 마이크로 스파이크를 차고 걷는데도 발이 미끄러져 중심을 잃는 오싹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 쌓인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구간에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산과 달리 안전장치가 없어 부주의로 인한 사고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만 한다. >


<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짙게 드리워진 안개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




 약 세 시간 정도를 오르고 나니 지겨웠던 스위치백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날씨. 해발 4,400m의 고도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예측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역시나 오르기 전 개었던 하늘이 정상에 다다를수록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상에 올랐을 때는 Tony의 사진에서 본 화이트 아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올라왔는데 정말 이러기냐?' 안개 가득한 정상에서 원망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했고, 안개 때문에 어두컴컴해진 정상은 음산한 기운마저 풍기는 듯했다. 아니 지쳐있던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빗방울 섞인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이내 땀으로 젖은 옷이 얼어 붓는 듯 차가워졌고, 바람을 피하기 위해 정상 한편에 위치한 대피소 안으로 몸을 숨기고는 Sketch가 올 때까지 잠깐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이 곳을 올랐던 하이커들이 남긴 방명록을 살펴보면서 초코바를 꺼내 물었고, 입안에 단 게 들어가고 나니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대피소를 나왔는데 짙었던 안개도 바람에 흘러가는지 중간중간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린 풍경을 한 번은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상의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기고는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거짓말처럼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트레일에서 벗어나 이틀이나 기다리며 바라 왔던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열린 하늘 사이로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수목한계선을 넘어 나무 한그루 없는 벌거벗은 산맥들이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우뚝 솟아나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대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이런 대자연 속에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다시 한번 겸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몇 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엄한 광경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뒤늦게 올라온 Sketch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는지, 오르자마자 보이는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 해발 4,400m 정상에서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피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내어 주었을까? >


<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힘들게 왔는데 정상에서 인증샷은 필수 아니겠는가! >


< 이 장엄한 광경을 보기 위해 이틀이란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Mt. Whitney'의 정상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




 감격에서 헤어나질 못하는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던 Sketch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러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으스스해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아 먼저 내려오기로 했다. 하산하는데도 시간이 족히 세 시간은 걸릴 것 같으니 너무 늦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벗었던 마이크로 스파이크를 다시 꺼내 신었다.


  결국 밤 10시가 다되어서야 돌아온 Sketch는 텐트도 치지 않고 바닥에 타이벡으로 만든 그라운드시트만 깔고는 카우보이 캠핑을 했다. 늦어서 걱정했다는 나와 Tony의 말에 짧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는 자리에 누워 홀로 밤하늘에 떠 있는 달만 응시하는 그에게, 뭐가 그리 궁금한지 이것저것 묻는 Tony를 말리고는 더 이상 센티 하여진 Sketch를 방해하지 않았다. 함께 올라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곳에서 그가 무얼 느꼈을지는 나도 모른다. 나와 같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분명 그 자신만이 느낀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고, 그는 그 여운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우리는 충분히 그럴만했고, 나도 그 여운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어 텐트 안에 누워 흐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Mt. Whitney'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는 져서 점점 어두워졌기에 뒤에 남은 Sketch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




 아직 새벽 6시밖에 안된 이른 시간이었지만, 웬일인지 Tony랑 Sketch가 먼저 깨어나 밖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리액션이 과한 걸 보니 아마 그동안의 일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몸이 으스스해 따뜻한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오늘은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곳인 'Forest pass'를 또 올라야 했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어 둬야만 했다. 어제 오른 'Mt. Whitney'가 가장 높긴 했지만 PCT에는 포함이 안 되는 곳이라, 오늘 오를 'Forest pass'가 해발 13,200ft로 트레일 상에서는 가장 높았다. 그래서인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다들 출발하기 전에 스트레칭을 이전보다 두배로 열심히 하며 몸을 풀었다. 다행인 건 이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틀이란 시간을 보내게 되어 그만큼의 식량이 줄어든 배낭이 그리 무겁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옵션으로 들리려 했던 'Lonepine'이 이제는 필수로 들려야 할 보급지가 되었다.


 "자! 오늘도 한번 가보자!!"


 우렁찬 목소리로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기합을 넣고는 기세 등등하게 출발했다.

 그것도 잠깐.. PCT/JMT 갈림길에서 다시 트레일로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업힐 구간은 기세 좋던 우리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스트레칭을 한다고는 했지만 아직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올라야 하는 오르막이 몇 배로 힘들기 때문이었다. '헥헥.. 이거 참 쉬운 게 하나도 없구먼!' 쌕쌕거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껏 펌핑된 허벅지를 부여잡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파르고 힘든 길을 오를수록 힘은 더 들겠지만,..

 그 길 뒤에는 장엄하고도 황홀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또다시 펼쳐 지리라는 것을...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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