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horn plateau'
만약 누군가 내게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봤다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곳이 바로 천국의 모습일 거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치 천국에 와있는 것 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아름다운 고원에 서서 할 말도 잊은 채 저 멀리 호숫가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는 다른 하이커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바로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이었다.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며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았던 사막의 길과는 다르게, 이 곳 시에라에서는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이 이루어 낸 아름다움을 느끼며 마치 잘 꾸며진 전시회에 온 것처럼 많은 것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동안 메말라있던 감정이 다시 촉촉이 적셔지는 것과 같은 느낌처럼.
'Bighorn plateau'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알았었다면 어제 조금 더 무리를 해서라도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그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 이 아름다운 고원이 주는 평온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Tony를 먼저 보내고 Sketch와 함께 호숫가 근처에 그냥 주저앉고는 때 이른 점심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기껏 해봐야 라면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먹고 있자니, 5성급 호텔에서 먹는 식사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먼저 와있던 하이커들은 분위기에 취했는지 아직은 기온이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수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게 행복 아니겠어?"
넌지시 던지는 스케치의 물음에 웃음으로 답해주면서 나는 저 멀리 병풍처럼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누워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 몇 년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여유도 못 가지고 몸까지 상했었는지, 행복이라는 게 돈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닌데 돈 때문에 아등바등 살아왔던 순간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아직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느끼고 있는 자유와 여유로움 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많았기에, 불안해하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대해 기대하고 싶었다.
'다 잘될 거야'.
두려워 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말아라 케이.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계속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볼일을 보고 온다는 Sketch를 뒤로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경치 좋은 곳에서 쉬고 나니 힐링이 되었는지 발걸음이 가벼워 오르막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나 역시 분위기에 너무 취해 있었는지, 멍청하게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한 시간이 넘게 길을 되돌아오기도 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다고 급경사를 여러 번 오르느라 진땀을 빼서인지 체력이 급격하게 빠져버렸다. 이미 앞서 간 친구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기에 급히 서두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오르막을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Forest pass'를 오르는 길이 아니었는가. 마르는 입을 물로 적시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천천히, 쉬지 않고 꾸준히 올랐다. 그나마 오르는 길의 경치가 가히 절경이었기에 몸은 피곤해도 눈만은 즐거울 수 있었다.
정상까지 1.5mi 정도 남은 지점에서 다행히 Sketch를 만날 수 있었다. 왜 이리 늦었냐는 그의 물음에 그간의 자초지종을 투덜대며 설명했더니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심심한 위로를 해주었다. 나쁜 놈.
아직도 많이 남은 스위치백을 올려다보며 크게 기합을 한번 주고는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였다. 역시나 고도가 높아서인지 주변의 호수가 아직 얼어 있는 게 보였다. 날씨만 좋았다면 냉수마찰이라도 한번 하고 갔을 건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에 금세 생각을 접어버렸다. 마지막 급경사 구간에서는 힘이 꽤 들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지 않아 위험한 구간은 없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옷이 젖게 되니 몸이 무거워져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진도 찍고 기쁨을 나누려고 하는 찰나, 엄청나게 큰 우박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오다 말겠지 하던 우박은 점점 더 굵고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번개까지 가까운 곳에서 치기 시작하니 정상에 올라있던 하이커들은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오르면서 봐 왔던 'Forest pass' 남면과는 달리 정상 아래의 북면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게이터를 하지 않으면 신발이며 바지까지 다 젖을 것 같았지만 불행히도 게이터를 챙기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눈 앞이 번쩍하고 고막이 찢어질 듯 '콰광'하는 소리에 놀라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Run!!!'이라고 외치는 순간 모두들 미친 듯이 내리막을 미끄러지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박은 맞으면 아플 정도로 강하게 내리고, 천둥번개는 미친 듯 쳐대고, 길은 눈이 쌓여 허벅지까지 빠지는 곳도 있어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해 소리를 지르며 즐기기 시작했다. 한 명이 늑대 울음소리를 내면 뒤따라 우리도 울음소리를 따라내며 미끄러지듯이 내달렸다. 실제 미끄러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눈이 많이 쌓여있어 다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광란의 질주였다. 누군가가 보았으면 미친놈들이라고도 했을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순간들이 익사이팅하면서도 너무 즐거웠다. 미친 듯 달리고 나니 어느덧 절반이 넘는 거리를 내려와 있었고, 그제야 주변의 경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해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아마 조금 더 내려가면 Trail magic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누군가가 장난 삼아한 말에 다들 쉬지도 않고 신발이고 옷이고 다 젖은 채로 지치지도 않고 내달렸다. 고도를 내리자 다시 비로 바뀐 우박 때문에 온 몸이 젖어 너무 추웠었기에 , 누군가 내려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이 너무도 간절했었다. 힘들게 내려와 말했던 지점에 도착했지만 모두가 기대했던 Trail magic은 없었다. 기대가 너무 컸었던 탓인지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에 더 이상 가는 건 무리라 판단하고는 숙영지를 구축하고 젖은 옷을 벗었다.
세 시간이 소요될 거리를 약 한시간 만에 달려왔기에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내 기분을 대신 표현해주고 있었다.
"내일은 'Lonepine'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어보자꾸나!"
7mi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의 Side trail인 'Kearsarge pass'만 넘으면 히치를 해서 'Lonepine'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게다가 내일은 일요일이었기에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많아 히치하이킹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오늘 수고했는데, 내일 마을에 들어가면 몸보신 좀 해야겠구나' 수만 가지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Tony는 내일 아침에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마 멀리 못 갔을 거야"
'Bighorn plateau'에서 먼저 갔던 Tony를 오늘은 만날 수 없었지만, 내일 가는 길목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 조금 일찍 일어나기로 하고는 얼른 잠을 청했다.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