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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Oct 05. 2016

구관이 명관





 비 때문이라는 핑계로 달콤한 제로데이를 'South lake tahoe'에서 보낸 후 트레일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비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모기가 물러가니 비님이 오셨나 보다.


 'Echo lake'를 지나 8mi을 더 진행했지만, 그날 운행을 종료할 때까지 비는 물론 천둥번개까지 난리도 아니었던.. 휴가시즌이라 그런지 인근 산장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이런 날씨를 개의치 않는지, 혹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하이킹을 한 건지 레인재킷이나 우의도 없이 비에 그대로 노출된 채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비 때문인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뤘다. 잠깐 눈을 부치고 6시쯤 일어났는데 너무 피곤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다행히 한 시간 후에 눈을 떠 간단히 아침을 챙기고는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인 'Sierra city'까지 토요일 오전 내 도착하려면 삼일 간은 25mi씩은 걸어야 했다. 그래도 이젠 몸이 단련되었는지 이렇게 비가 괴롭히는 상황에서 걷는 게 힘들지가 않다. 다만 거의 일주일 동안 하루에 적게는 3시간, 많게는 6시간 동안 내리는 비로 인해 옷이나 장비가 마를 날이 별로 없어 추위와의 싸움이 계속되는 게 문제였다. 덕분에 워싱턴주 구간에 들어가기 전 비에 대한 예행연습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긴 했다.




< South lake tahoe에서 트레일로 복귀하고 바로 지나게 되는 Echo lake. 저 멀리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지겨운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




 오늘도 점심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심쯤에는 새끼손톱만 한 우박이 우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행구간에 물을 얻을만한 곳도 없어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조금 더 걸은 후에야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와 중에 매운 게 먹고 싶어 지인이 보내준 불닭볶음면을 하나 끓여먹고는 속이 너무 아파 메쉬 포테이토로 속을 좀 달래주었다. 비는 오지만 커피도 한잔 내려마시며 나름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아주 튼튼하게 생긴 여자 하이커가 지나가며 혹시 'Chef'라는 마른 여자애 한 명 지나가는 걸 봤냐며 내게 물었다. 내가 여기서 점심을 먹은 이후로 아무도 안 지나갔다고 하니 고개를 기웃거리며 잠깐 생각을 하더니 남자처럼 과한 액션과 함께 웃으며 'Thunder bunny'라고 내게 인사를 청했다. 케이라고 나를 소개하고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다른 한국인 하이커인 희남이와 희종이를 만난 적이 있다면서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곤 나중에 보자며 가던 길을 힘차게 걸어갔는데 뭐가 훅하고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참 당돌한 친구였다. 걸 크러쉬라고 해야 하나?


 역시나 너무 매웠는지 걷는 내내 배가 아프고 그나마 비를 덜 맞을 수 있는 화장실을 찾느라 한참을 헤매기도 했다. 원래 매운 걸 좋아하고 잘 먹었는데, 그동안 무미건조한 음식들만 먹다가 캡사이신 덩어리를 먹어서인지 속이 완전히 뒤집어졌는가 보다. 다시는 도전 안 하는 걸로...




< 새끼 손톱만한 크기의 우박이 마치 눈처럼 트레일을 뒤덮기 시작했다. 바람때문에 간혹 얼굴에라도 맞을때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




 간간히 드는 햇볕에 장비랑 옷을 말리기도 했는데 오늘은 비가 안 그쳐 텐트를 못 말렸다. 몸까지 으스스하면서 굳기 시작하고 이미 손가락은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저체온증이 올까 봐 일부러 오르막을 뛰는 듯 빠르게 걸어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도저히 안될듯해 따뜻한 커피를 한잔 끓여 마시고 다운재킷에 장갑까지 단단히 무장 후 다시 길을 걸었다. 이름 모를 산을 하나 올랐는데 정상에서는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가 없어 더 추웠다. 그런데 건너편 산에 송신탑이 있어서인지 휴대폰이 되길래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상 기형 하고 통화까지 했다.


 'T-mobile'의 선불 유심을 사서 사용 중이었는데, 트레일에서는 되는 곳이 거의 없어 마을에나 들어가야 통화가 가능했다. 다른 통신사, Verizon이나 AT&T를 쓰는 친구들은 간혹 되는 구간이 있어 트레일에서도 SNS를 하거나 통화를 하는 등 효과를 봤지만 나는 그런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미국 서부 쪽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선불폰을 사용하려면 절대 'T-mobile'은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저녁을 먹고 움직일라 했는데 물이 없다. 물을 좀 받아 왔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동안 물이 필요할 때마다 쉽게 구해오다 오래간만에 물이 없는 구간을 걷다 보니 예전 사막 구간을 걷던 게 생각이 났다. 오늘 목적지까지 가기엔 너무 기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토르티야에 누텔라를 발라 먹고도 모자라 육포에 캐러멜까지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산 능선을 계속 걷는 길이라 가슴은 탁 트였다.

 비 때문에 안개가 끼어 시야는 흐렸지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물이 없었기에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숙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몇 마일 안 가서 작게 흐르는 개울을 만날 수 있었고, 물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주변 텐트사이트에는 이미 예닐곱 개의 텐트가 쳐 있었다. 빈자리를 찾아 개울에서 조금 떨어진 한쪽 구석에 텐트를 치고 보니 바로 옆텐트의 주인이 아까 만났던 Thunder bunny와 그가 찾아 헤맨 Chef 였다. 잠깐 마주친 것뿐이었는데 마치 잘 아는 친구를 소개하여주듯 Chef에게 나를 소개하였고, 아까 먹은 토르티야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들이 건네 준 레몬티와 브리또로 두 번째 저녁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두 친구가 오레곤 구간부터 PCT를 끝낼 때까지 함께 한 'HBG'(Hiker Box Gang)의 걸 크러쉬, T-bunnz와 Chef였다.


 짧은 영어로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춥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내곤 각자 잠자리로 돌아갔다. 내일은 좀 더 따뜻하고 비가 안오길 기대하면서.




< 길게 뻗은 능선을 따라 걷는 길. 안개때문에 시야는 흐리지만 구름이 주변을 지날때에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아침에 눈을 떴는데 붉은빛이 비치길래 밖을 나가보니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오래간만에 아침부터 떠 있는 해가 반가워 결로로 다 젖은 텐트를 말리고 출발하려다 그냥 점심 먹을 때 말리는 게 나을 듯 해 짐을 챙기고는 빠르게 출발했다. 확실히 호수나 개울 근처에서 숙영을 하면 결로로 인해 텐트가 다 젖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웬일인가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10시가 좀 넘어가니 비구름이 또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점심 즈음이면 도착할 산 정상에서 여유 있게 텐트도 말리면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비구름이 멀리 있다 싶었는데 곧 비가 왔다. 조금씩 오더니 하필 정상에 올랐을 때는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바람은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불어오고, 눈 앞이 번쩍번쩍 음향효과도 쩌렁쩌렁! 미국은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왔다 하면 거의 약한 태풍 정도의 수준으로 비가 내렸다. 혹시나 몰라 가지고 있던 트레킹 폴을 버릴까도 하다가 아까워 배낭에 메달 고는 무서워서 냅다 뛰었다. 곧 그칠 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계속되는 번개 때문에 위험해 다행히 앞에 보이는 능선에 솟은 큰 바위 아래 동굴 같은 곳에 짐을 풀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가까운 곳에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 줄기가 바로 앞에 보이는데 번쩍 하자마자 고막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소리가 몸까지 울리면서 메아리쳤다. 이젠 그런 것도 익숙해졌는지 그 와중에 물을 끓여서 건조 식량으로 점심을 때웠다. 공포영화를 감상하듯 번쩍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좁은 공간에서 앉은자리를 바꿔가며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끔 공간을 확보해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가지기도 했다. 비가 그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기에 느긋하게 기다리며 폭풍 속의 고요를 즐겼다.




< 천둥번개와 강한 비바람 속에서 나를 지켜주었던 서프라이즈 자연쉘터. 이 곳에서의 두시간은 마치 폭풍속의 고요와 같은 시간이었다. >


<  허허벌판인 산 정상에서 이 쉘터같은 바위 밑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더라면 아주 끔찍한 순간을 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




 정확히 두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배낭을 꾸려 다시 출발했다. 2,500m가 넘는 곳이라 춥기도 엄청 추웠다. 장갑을 낀 손도 감각이 사라져 장갑을 벗고 속살에 녹이면서 다녀야만 할 정도였다. 여기가 이럴 정도면 가을로 접어드는 워싱턴 구간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워싱턴 구간이 PCT 중에서 가장 습하기도 하고, 장기간 비가 오는 구간이라 오죽하면 다들 비에 지친다는 표현을 할 정도였다. 체온을 높이기 위해 뛰면서 빠르게 산을 내려왔지만, 추워서 도저히 안될 거 같아 배낭을 내리고는 팔 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Power thighs가 힘들어 죽겠는데 넌 체력도 좋다면서 박수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추워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어.. 나도 힘들어 죽겠지만 추운 게 더 힘들어"


 손발도 차고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속도 모르고 짜식이.. 그리고 나이도 어린놈이! 속으로 말했다. 생긴 건 나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만 아직 20대인 Power thighs였다. 만난 김에 말동무도 할 겸 함께 걸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오니 트레일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한대 서있고 하이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길래 가보니 'Danielle'이라는 아가씨가 트레일 매직을 펼쳐놓고 있었다. 20대에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마음씨도 착해요! 그동안 추위에 떨었던 순간들과 지금의 이 행복한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 기분에 맥주를 세 캔이나 비우고는 샌드위치에 쿠키, 위스키까지 마셨다. 추워서 그런지 다들 맥주를 안 마시길래 Power thighs랑 내가 다 마셔버렸다. 어둑해지는 하늘 때문에 더 있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에 Danielle과 깊은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목적지에는 겨울 시즌 관광객들을 위한 쉘터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다. 축축한 텐트에서 잠을 안 자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라고, 일주일 넘게 계속되는 비보다는 모기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절묘한 타이밍에 만나서 더 반가웠던 Danielle의 트레일 매직. 차가 기아차라 더 반갑기도 했다. >


< 내겐 천사같았던 Danielle, 그녀의 트레일 매직 덕분에 하루종일 고생한 몸과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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