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lmost ther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ol K Oct 06. 2016

여유로움



 

  '철컹'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다소 뻑뻑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간 쉘터에는 이미 다른 하이커들이 먼저 와 있었다. Songbird와 Whatever. Whatever는 처음 만난 하이커였는데 20대 초반의 남자로 약간은 히피 같은 스타일의 친구였다. 내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Power thights와 Shade & Pogo 형제가 도착했고, 그 뒤로 여러 하이커들이 계속해서 쉘터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비 때문에 고생을 해서인지 다들 비를 피할 수 있는 쉘터로 모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칙칙한 냄새난다고 그냥 지나쳤을 쉘터였을텐데...


 다들 2층에 자리를 맡고 난 후 1층 테이블에 하나 둘 모여 저녁을 먹었지만, 나는 과한 트레일 매직 덕분에 배가 불러 저녁 대신 단백질 파우더만 물에 섞어 마셨다. Shade 형제와 항상 같이 다니던 Sticks가 보이지 않아 어디 있냐 물으니 'South lake tahoe'에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왜 그만두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알아도 달라질 건 없었기에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여기서 또 처음 만난 하이커였는데 눈길이 가는 하이커가 있었다. 'Phish out of water'라는 긴 닉네임을 가진 하이커였는데, 나이는 마흔 중반이라고 소개를 했다. 키도 크고 다부진 체격에 무엇보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참 매력 있었다. 미국 하이커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Phish도 턱수염은 물론 콧수염까지 길렀는데, 인중에 상처가 있어 그 부위에만 수염이 자라지 않아 미안하지만 웃겨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서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그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면서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1년 중 3개월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또 3개월은 자원봉사, 나머지 6개월은 장거리 트레일이나 여러 나라를 배 낭하는 식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했는지, 이혼을 했는지 아니면 원래 싱글이었는지는 몰라도, 인생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본인의 삶에 만족하고 즐기며 사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르바이트라고 부르는 Job을 가지고도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인식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런 그의 삶이 부럽기도 했다. 만약 내가 내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고 살면서 내 인생을 즐긴다고 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가족, 사회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아직 우리 사회는 나 스스로만 당당하다고 해서 뭔가 이뤄나갈 수 있는, 혹은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듯했다.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이나 가족까지도 받을 영향을 생각해야만 하는 게 우리 문화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그의 삶이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편안함과 행복이 묻어 있었기에...


 


< 원래는 겨울시즌 스키어들을 위해 마련된 쉘터였지만, 오늘은 우리를 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




 확실히 텐트를 걷을 일 없는 날의 시작은 여유로운 아침을 즐길 수 있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음에도 오전 7시에 출발, 하늘이 어두컴컴한 게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아 우의를 미리 빼놓고 운행을 시작했다. 지겹던 비도 이젠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 비가 올 듯 말 듯하면서 오지 않는, 그렇게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걷기에 딱 좋은 그런 날씨가 계속되었기에 신나게 걸을 수가 있었다. 최근 들어 하루 일과 중 빠지지 않는 게 있다면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는 커피를 한잔 내려 마셨다. 커피를 내릴 때의 그 향이 주변의 풍경과 너무도 잘 어울려서인지 그 순간의 낭만을 즐기는 게 너무 좋았다.


 매일같이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삶을 살았었지만 이 곳에서는 늦게 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빨리 간다고 해서 칭찬할 사람도 없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지면 되는 것이었다. 시간에 쫓겨 고향 친구 한번 만나러 갈 시간도, 가족 친지들이 다 모이는 명절 때조차 일한다고 찾아 뵐 시간이 없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그땐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일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 정도는 가지고 해야 맞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추구하는 인재상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올인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가정도 포기하고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이고, 행복한 것일까? 어느 게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런 삶 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에서 즐기는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고, 이 길을 걷고자 했던 내 선택이 후회되지 않았다. 인생을 살면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 볼 수 있다는 건 행복하고 멋진 일이었다.


 날씨 덕분인지 오늘은 32mi을 넘게 걸었다. 사실 2mi 밖에 남지 않은 'Sierra city'를 오늘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2mi을 남기고는 텐트를 쳤다. 누군가 텐트를 친 흔적이 없는 곳이었고, 마을과도 가까운 곳이라 이쯤 오는 하이커들은 다들 마을로 들어갈 것이기에 오늘은 이 주변의 고요함을 오롯이 나 혼자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낮에 드리운 구름도 오늘만큼은 나를 배려했는지 밤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 가끔 열리는 하늘과 맞닿아 걷는 길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는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




 'Sierra city'는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City라 도시 정도는 안되더라도 꽤 큰 마을일 줄 알았는데, 10분이면 마을을 다 돌아볼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도 트레일과 인접한 곳이라 그런지 하이커들한테는 아주 친절하고 소박해 보이는 마을이라 마음에 들었다.  


 오전 9시가 좀 넘은 시간에 도착해서 도로가에 바로 보이는 General store 앞에 배낭을 내리고 잠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하이커들이 하나 둘 Store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 마을이 휴대폰이 터지질 않아 유일하게 Store에서 제공하는 Free wifi가 하이커들에게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Tuolume meadow에서 만났던 River jelly랑 Chopstick을 만났다. 전날 도착했다는 그들에게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하고 나니, 친절하게 마을에 대한 정보를 내게 방향까지 가리키며 알려주기 시작했다.  Store 우측 뒤편에 있는 교회 옆 마당에서 공짜로 캠핑을 할 수 있고, 바로 앞의 화장실에 샤워실이 있어 차가운 물이긴 해도 공짜로 샤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 전화도 안되고 눈에 보이는 건물들이 마을의 3/2가 될 정도로 아주 작았던 마을.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람냄새가 풍긴 이 시골마을이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




 아직 우체국이 문을 열지 않아 일단 교회 옆 마당으로 이동했다. Phish와 Songbird도 벌써 와있었다. 텐트에서 나오는 걸 보니 어제저녁에 도착한 듯했고, 그 외에도 많은 하이커들이 하나 둘 텐트 안에서 기지개를 펴고 나오고 있었다. 얼굴들을 보아하니 다들 눈이 움푹 파인 게 어제 과하게 한잔 걸친 얼굴들이었다. 일찍 텐트를 걷고 나서는 하이커가 있어 그가 머물었던 자리에 텐트를 미리 쳐두고는 우체국에서 보급품을 찾아왔다.


 Phish가 떠나기 전 이 곳 Store에 있는 식당(식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스낵바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에서 파는 '1 pound berger'를 꼭 먹어야 한다며 적극 추천을 한 터라 점심으로 한번 사 먹어 봤는데 이건 정말 물건이었다. $10도 채 안 했지만 패티 무게만 400g이 넘었다. Zoolander와 함께 맥주 한 병씩 들고 Store 밖의 난간에 앉아 먹는데 이건 도저히 입으로 베어 물기도 힘든 사이즈라 어울리지도 않는 포크와 나이프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식사시간을 10분을 안 넘기는데 이놈은 거의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먹어야만 다 먹을 수 있었다. 맥주 한 병까지 더하니 배가 너무 불러 걷기도 힘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너무 맛있어서 하나 더 사 먹고 싶을 정도였으니 그 맛이 어느 정도 일지 감이 올 것이다.




< 'Sierra city'를 들릴 일이 있다면 무조건 맛봐야 할 1pound berger의 실제 사진. 패티만 400g이 넘어 혼자 먹기 버거울 정도였지만 너무 맛있었다. >



 오후가 되자 이제 막 도착하는 하이커들과 술이 깬 하이커들이 Store로 모이기 시작했다. Shade 형제와 daysleeper, Slug, Boombox 등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친구들과 새로 알게 된 친구들. 다들 그동안 연락 못한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Free wifi가 제공되는 Store 앞으로 자연스레 모였고, Store는 그런 그들에게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시골같이 정겨운 작은 마을이 주는 이런 편안하고 사람 냄새나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 길에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겐 모두 소중하고 감사한 순간들이었다.




< 교회에서 제공한 옆마당에 텐트를 치고,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며 카드게임을 즐기는 하이커들. 머리에 버프를 한 친구가 나랑 함께 햄버거를 즐긴 zoolander이다. >




 어제 햄버거를 먹고는 너무 졸려 낮잠을 푹잤서 밤에 잠을 못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푹 잘 잤다. 5시 반쯤 일어나 어제 찾은 보급품에서 알파미와 고추참치를 비벼먹고는 것도 모자라 신라면까지 하나 끓여먹었다. 아침으로...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점심으로 먹은 햄버거 때문에 저녁을 걸러서 배가 고팠다.


 일찌감치 배낭을 정리하고는 결로에 젖은 텐트를 길가에 펼쳐 놓았다. 7시가 되니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고, 서로 부은 얼굴로 어색하게 아침 인사를 나눴다. 아직 시간이 일러 커피나 한잔 할까 했는데, 옆집의 캠핑카 할아버지가 이 곳에 머물고 있는 PCT 하이커들을 위해 아침으로 커피와 빵을 준비해뒀으니 어서 오라고 하셨다. 이미 거하게 아침을 먹은 터라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 따라갔다가 할아버지께서 준비해놓으신 먹음직스러운 빵이랑 과일을 보고는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어 한 조각만 먹자고 한 게 빵 3개, 바나나, 커피에 파인애플 주스까지 먹어버리고 말았다.  


 '많이 걸어야 하니 많이 먹어둬야지..'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돌아오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아! 햄버거!!!!' 어제 먹은 햄버거가 너무 맛있어 오늘 가기 전에 하나 더 사 먹고 가려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햄버거는커녕 피클 한조각도 더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무식한 놈..', 희한하게 트레일에 있으니 먹을 것만 보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식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매일 4,000 kcal 이상을 태우지만, 섭취하는 열량은 훨씬 못 미치다 보니 자연스레 먹을 것에 대한 욕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몸이 더 먹으라고 최면을 거는 듯이 말이다.


 짐 정리를 다하고 마지막으로 Store에서 휴대폰을 충전시키고는 출발했다. 마지막까지 햄버거가 아쉬웠지만, 앞으로 또 다른 맛있는 음식들을 만날 수 있겠지 하며 얼른 길을 나섰다. 트레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약 1.5mi의 로드워킹(일반 도로를 걷는 것)을 해야만 했는데, 히치하이킹을 하려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히치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더 걸릴 듯 해 그냥 걸었다. 트레일에 복귀해서도 약 8mi의 오르막을 쉬지도 않고 올랐는데, 잘 먹어서인지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배가 꺼지지도 않아 행동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결국 4시가 넘어서 'A-tree'라는 Water spot에 도착했고, 그제야 허기가 느껴져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을에서 약 20mi 정도 진행한 지점이었다. 이젠 20mi 정도는 우습게 걸을 정도로 몸이 완전히 트레일에 적응을 한 듯 느껴졌다.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일까? 저녁을 먹고 약 10mi 정도 더 진행했는데 엊그제까지 내린 비로 땅이 많이 미끄러워 두 번이나 넘어져 옷은 물론 배낭까지 다 배리고 말았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더 진행하는 건 무리라 판단하고는 인근에 텐트 칠 만한 공간을 찾고는 짐을 풀었다.




< 8mi 정도 되는 오르막을 올라 선 정상은 아무것도 볼게 없었지만,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




 30mi을 거의 쉬지 않고 걸은 하루였다.

 마을을 들러 영양보충을 하고 나선 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몸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 시작부터 길을 포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던 무릎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덕분에 다른 근육들이 발달해 피로를 덜 느끼는 듯했다. 시에라 구간의 업힐 구간을 트레킹 폴 없이 맨다리로 걸었던 것도 아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마치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변화.


 뭐가 변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아직 없지만,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여유로워진 걸까? 이 길에 서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길을 끝낼 쯤에는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 to be continue... >

매거진의 이전글 구관이 명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