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어떤 놈인지 몰라도 텐트 주변을 자꾸 어슬렁 거려서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소리가 거슬려 밖에 나가보면 모습을 감춰 아무것도 안 보이고, 텐트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주변을 서성거리곤 했다. 일전에 텐트 주변에 사슴이 있었을 때는 내가 텐트 밖으로 나가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는데 이 놈은 아니었다. 마치 발자국 소리를 숨기듯 걷는 소리로 봐서는 아마 코요테나 다른 산짐승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례 했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야생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동물은 대표적인 곰 외에도 쿠거라고 알고 있는 마운틴 라이온, 그리고 코요테 등이 있었다. 곰은 아니니 야행성인 마운틴 라이온 아니면 코요테일 거라 생각했다. 발소리가 오른쪽에서 나면 나도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왼쪽에서 소리가 나면 나도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곤 유사시 언제라도 몸을 지킬 수 있도록 작은 폴딩 나이프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낮은 저음으로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계속 내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신경전을 벌였다. 하필 오늘같이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하긴 다른 하이커들까지 있었으면 이렇게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그러고 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손에 쥔 나이프를 놓지 않고 잠이 들어버렸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어제저녁 내내 나를 괴롭힌 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주변을 훑어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발자국 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밥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도 최대한 많이 걷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배불리 먹어둬야 만 할 것 같았다. 저녁으로만 먹던 마운틴하우스(건조 식량)를 아침으로 거하게 먹고는 커피도 한잔 내려 마셨다. 마운틴하우스가 비싸긴 해도 영양가도 높고 또 2인분으로 표기되어 있어 혼자 먹기엔 다소 많은 양이라 하나를 다 먹고 나면 포만감이 엄청났다.
비는 이제 물러갔는지 날씨는 쾌청했고, 선선한 바람도 불어주니 걷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제 나보다 앞서 갔던 하이커들을 하나 둘 만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50mi 정도 구간 안에서 걷는 하이커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주 만나게 되었다. Tony랑 Sketch, 그리고 Kate는 어디쯤 걷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확실한 건 그들이 나보다는 뒤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길에 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리움을 마음 한편에 접어 두었다. 오늘도 능선을 타고 걷는 길이라 하늘이 뻥 뚫려있어 답답하지는 않았다. 다만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나무가 없어 머리와 뒷목이 엄청 뜨거워졌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비 좀 그만 오고 해가 빨리 떴으면 했는데, 해가 뜨고 나니 또 덥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참 사람 욕심이 끝이 없네'
적당히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곳을 찾아 점심을 먹기 위해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Chef가 해준 토르티야 브리또가 계속 생각이 나서 한번 따라 해 봤는데, 맛도 그렇고 문제는 양이었다. 속에 넣어야 할 앙꼬로 마운틴하우스랑 메쉬 포테이토까지 만들다 보니 처치 곤란할 정도 양이 너무 많아져 혼자는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그래서 그때 Chef도 나한테 나눠 준거였구나...'
옆에 같이 쉬고 있는 다른 하이커들에게 억지로라도 하나씩 만들어 주고 나서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Chef가 해준 건 맛이라도 있었는데 내가 한 건 맛도 없어 괜히 나눠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아마 속의 앙꼬가 문제인 듯. 칠리 맥에 고추장, 메쉬 포테이토까지 넣었는데 맛이 너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맛은 없었지만 배는 부른 식사를 마치고 그늘에 앉아 솔솔 부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잤을까? 약 20분 정도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고 나니 몸에 생기가 도는 듯 개운하면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잠이 보약이야!'
먼저 일어난 친구들을 따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아까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하다 T&G(Touch & Grey)가 오늘 걷는 구간에 수영을 할 만한 좋은 풀장이 있다고 한 게 기억이 나 낮에 흘린 땀에 젖은 셔츠도 빨고 수영도 하며 잠시 머물다 갈 생각으로 속도를 좀 높여 걸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는 길이라 그리 힘들진 않았지만, 오래간만에 땡볕에서 걸으려고 하니 너무 더워서 땀이 많이 났다. 셔츠가 거의 다 젖을 무렵 드디어 만난 'Middle fork feather river'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폭이 큰 강이었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최근 내린 비 때문인지 수량이 적진 않았다. T&G가 말한 대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넘어로는 큰 풀장처럼 강 폭이 넓은 곳이 있었고, 쉼터처럼 솓은 바위 위로 Power Thights랑 T&G, Jamie와 그녀의 개(Sonoma pass를 지날 때 함께 사진을 찍었던 허스키)도 함께 쉬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전 시에라 구간처럼 물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몸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젖은 셔츠를 대충 물에 적셔 말리고는 친구들과 함께 마냥 즐거운 애들처럼 다이빙도 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물속에 오래 있으니 체온이 금방 내려가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기 시작해 아쉽지만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덜 마른 셔츠를 입고는 한창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휘파람을 불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열기가 식히고 덜 마른 셔츠에 바람이 묻어갈 때는 온몸에 시원함이 전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었는데, 아직 해가 한창 떠 있을 때고 컨디션이 좋아졌는지 벌써 25mi을 걸어왔지만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못 먹어도 Go라며 다시 길을 나섰는데 이게 웬일, 경사가 점점 높아지는 오르막이 나오기 시작했다. 데이터북의 고도표를 보지도 않고 길을 나선 게 잘못이었다. 온 길을 되돌아 갈 수도 없고 길은 좁은 비탈길이라 중간에 텐트를 칠 수도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진행을 해야만 했다. 해는 점점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경사는 점점 높아졌다. 이내 깜깜해져 헤드랜턴을 켜지 않고는 앞이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라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고는 계속 올랐다. 힘들긴 했지만 속도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고 출발해 저녁 9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서야 저 멀리 텐트 불빛이 보였고, 거기까지 간 후 트레일 옆의 비탈에 나있는 작은 공간에 텐트를 칠 수가 있었다. 3시간도 채 안된 시간에 6mi의 경사가 높은 오르막과 2mi의 평지를 걸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힘을 내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무리를 한 듯했다. 굳이 더 진행할 필요가 없었는데 순간의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몸을 식히며 단백질 셰이크를 한잔 하고 있는데 내가 걸어온 길에서 누군가의 불빛이 보였다. 내가 헤드랜턴을 켜자 굵직한 목소리로 'Cool K??'하며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그 걸음걸이가 딱 Thunder Bunny였다. 분명 여잔데도 왠지 모르게 남자 같은 이 친구는 또 Chef를 못 봤냐며 내게 물었고, 나도 막 도착해서 정신이 없지만 오늘 하루 종일 Chef를 본 적이 없다고 하자 해맑게 웃으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가야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참 씩씩하고 재미있는 친구였다. 같이 다니던 Chef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여리게 생긴 천생 여자였는데, 둘이 정말 상반된 역할이라 탈없이 함께 다닐 수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일찍 서둘면 보급품을 찾을 수 있는 'Belden'에 오늘 도착할 수 있을 듯해서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그래도 커피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먹은 만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출발은 순조로웠다. 어제 나를 지나쳐 간 Thunder bunny와 Chef를 중간에 지나치기도 했고, Bucks lake Wildness로 진입하는 곳에서는 그곳에 남겨진 방명록에서 나보다 앞서 출발한 희종이와 희남이가 남길 글을 볼 수가 있었다. 오늘이 7월 14일인데 그들은 이 곳을 7월 10일에 지나갔으니 4일 정도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조만간 만날 수도 있는 거리였기에 그들과 함께 맥주 한잔 할 시간을 기대하기도 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모자에 깃털을 꼽고 있는 한 하이커가 먼저 방명록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목에 수건 또는 스카프 같은 걸 돌돌 말아서 'O'링처럼 만들어 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보던 미 해병대의 모습과 흡사했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검게 그을린 얼굴,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군살 없는 몸매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내가 뒤에서 오는 걸 보지 못하고 가던 길을 갔기에 인사를 나누진 못했지만, 방명록에 그가 남길 글을 보니 트레일 네임이 'Wildman'이라고 적혀 있었다.
PCT를 끝내고 아쉬움에 시애틀에서 삼일을 머물며 이 여정의 마지막을 보낼 때까지 함께 했던 나의 절친, 미 해병대 출신의 'Wildman' Joel Hibler의 뒷모습이었다.
'Belden'까지 28mi 정도 남은 거리라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어제 오른 길만큼 오늘은 내려야만 했다. 다들 내리막길이 수월할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오르막을 오르는 것보다 다리에 힘이 더 많이 들어가고 자칫 발을 접지를 수도 있어 주의를 많이 기울여야만 했다. 계속되는 내리막에 쉽지 않은 걸음을 하기도 했지만, 출발할 때 방심한 나머지 물을 많이 챙기지 않아 마지막 내리막 구간에서는 목이 말라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도 오르막을 오를 때보다는 속도를 더 낼 수가 있었기에 오후 6시 전에 'Belde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조트라 하기엔 아주 작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 밖에 Phish가 앉아서 보급품을 살피고 있었다. 고생했다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잡은 후 배낭을 내리곤 옆에 앉아 지친 다리를 어루만졌다.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찾아봤지만 물을 뜰 수 있는 곳이 없어 리조트 안의 스토어에서 아무 음료수나 손에 잡히는 대로 끄집어 내서는 계산과 동시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식도를 타고 몸 안으로 퍼지는 청량감을 느끼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Yogi`s book'이라는 가이드북으로 계획을 세울 때 이곳에 있는 Angel house인 'Braaten'을 많이 이용한다 해서 그쪽으로 보급품을 보냈는데, Phish나 이 곳에 있는 다른 하이커들은 그냥 보급품만 찾고는 트레일 들어가기 전에 있는 공터에서 캠프를 할 거라 했다. 같이 가서 맥주한잔 하자는데, 보급품을 그쪽으로 보내서 가야만 한다고 하니 웃으며 내일 만나자고 인사를 했다.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왜 안 가려 하지? 궁금했지만 늦은 시간이라 안내판에 적혀있는 대로 바텐더를 통해 Angel에게 연락을 하고는 건물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픽업을 오기로 한 Angel을 기다리는 동안, 하이커로는 보이지 않는 아저씨가 작은 상자를 하이커 박스에 두고 가길래 살펴보니 뜯지도 않은 마운틴하우스가 떡하니 있었다. 냅다 집어서 챙기고는 나를 데리러 온 Angel과 함께 약 1.5mi 벗어난 곳에 위치한 'Braaten'으로 향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안내해주는 대로 짐을 풀고는 수많은 보급품 중 내 이름이 적힌 박스를 찾아 Angel에게 확인을 받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왠지 엄숙해 보이는 집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이미 그곳에는 나 말고도 어느 나이가 지긋하신 아주머니 한분과 젊어 보이는 청년이 먼저 와 있었다. 'Oregon'에서 왔다는 그들은 엄마와 아들이 함께 PCT를 걷고 있는 하이커였고, 이 곳에 이틀째 머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엄마와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고, 외롭지 않게 친구 이상으로 기댈 수 있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건 둘째 치더라도 이 큰집에, 그것도 Angel house인데 머무는 하이커들도 적고 너무 조용한 게 이상했다. 혹시나 해서 집을 한번 둘러보았더니 처음 들어올 때는 놓쳤던 안내 문구가 거실 중앙에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No Alcohol! No Smoking!
Phish나 다른 친구들이 왜 이 곳으로 안 오고 공터에서 캠프를 한다고 했는지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엄격한 룰이 이 곳의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 하겠다던 소박한 나의 꿈이 저만치 날아가는 걸 쓸쓸히 바라보면서 아무 말 없이 애꿎은 보급품만 풀었다 다시 넣었다 만지작거렸다.
더한 건 밖에서는 되던 휴대폰마저 No signal!! 게다가 이 곳은 Wifi마저 안 되는 곳이었다.
"아~ 이놈의 Yogi! 아~ 망할 놈들!! 귀띔이라도 좀 해주던가..."
구슬프게 우는 귀뚜라미 울음만이 나를 위로해주는 쓸쓸한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