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의 정신수양을 마치고 아침 일찍 트레일로 복귀했다.
고맙게도 Angel이 나를 트레일까지 데려다주며 산에 포이즌 오크가 많이 자라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는데, 정말 산을 오르는 길 지천에 포이즌 오크가 징그럽게 자라 있었다. 그냥 풀잎처럼 생겼지만 피부에 쓸리기라도 하면 그 부위에 수포가 생기고 진물까지 나며 고통을 준다고 했다.
아침부터 오르막 길을, 것도 포이즌 오크를 피해 다닌다고 진땀을 뺐다. 만만한 오르막이 아니어서 땀이 비 오듯 흘렀는데 다행히 주변에 도랑이 많이 흘러 중간중간 머리를 물로 식히며 오를 수 있었다. 이른 점심 후에는 물이 아주 맑은 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놀이하기에 딱 좋은 사이즈의 계곡에는 이미 Phish와 Kyle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Phish를 보자마자 왜 얘길 안 했냐면서 어제 수도원에서 정신수양을 했던 얘기를 꺼내니 자기도 그런 줄을 몰랐다며 익살맞은 표정으로 깔깔거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땀도 많이 흘렸겠다 웃통을 훌러덩 벗고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움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10초도 안돼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에 개운함을 느끼고는 벗어 둔 땀에 절은 셔츠를 물속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물을 정수하고 있는 Phish 옆에 앉아 담배를 한대 말아서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찾았는데 아뿔싸! 셔츠의 가슴 포켓에 넣어둔 걸 깜박하고는 물에 담갔던 게 생각이 났다. 당연 셔츠 주머니에는 라이터가 없었고, 셔츠를 담갔던 곳을 찾아봤지만 라이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세상을 다 잃은듯한 슬픔을 느끼고 있는데, 트레일을 따라오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Thunder bunny였다. 뒤로 나이가 좀 있는 듯한 여성 하이커와 어제 본 Wildman도 따라오고 있었다.
Thunder bunny의 소개로 Wildman 그리고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성 하이커인 Mamagoose와 통성명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혹시나 해서 라이터가 있는지 Wildman에게 물었더니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내게 주면서 가지라고 했다. 내가 정말 가져도 되냐고 반문을 하니 자기는 담배가 다 떨어져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내 뒤에 보자는 Thunder bunny의 인사와 함께 'Let`s go!' 구호에 맞춰 이들 세명은 다시 길을 나섰다. 짧은 만남이었다.
담배를 마저 피우고는 Phish와 Kyle 보다 먼저 길을 나섰다. 점심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르막을 계속 올라서인지 갑자기 허기가 막 지더니 앞도 잘 안 보이고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급한 대로 'Belden'에서 산 'Iced oatmeal'이란 과자를 꺼내 먹었다. 아마 당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시럽이 발린 과자를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커피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갈증이 나서 물을 대신 마셨다.
힘들게 바지를 잡아끌며 오른 오르막의 마지막 구간에서 먼저와 정상 탈환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Wildman과 Mamagoose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Mamagoose는 만만한 산이 아닌 걸 알고 있었는지 축배를 들기 위해 정상까지 무거운 병맥주를 가져오기도 했다. Wildman에게 담배를 건네며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담배 없는 안타까움과 서러움을 아는 사람만 나눌 수 있는 그런 정이었다.
13 mi의 산길을 오르는 일은 엄청 힘들었다. 역시 PCT는 시에라만 힘든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전 시에라 구간의 어느 Pass를 지날 때,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어떤 놈이 Forest pass(PCT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만 지나면 다 내리막이라 했어!" 라 외치며 서로 웃고 하던 게 생각났다. 오늘 가능한 많이 걷고 싶었지만 체력소모가 너무 커 적당한 지점에서 텐트를 치기로 했다. 그만큼 피곤했다.
축배를 즐기는 둘을 뒤로하고 또다시 혼자 길을 나섰다. 해가 질 무렵에 앞서가던 Thunder bunny를 다시 만났고, 우리는 아마 오늘의 마지막 Water spot인 듯한 지점에서 물을 뜨기 위해 잠시 쉬기로 했다. 물은 트레일을 벗어난 옆 길을 따라 0.4mi 정도 진행한 지점에서 구할 수 있었고, 내일 아침과 운행에 필요한 물 3L 정도를 정수한 후에 다시 트레일로 돌아왔다. 너무 허기가 져 저녁을 먹고 출발을 해야겠다고 하자 자기는 8시 반까지는 걸어야겠다며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Thunder bunny를 보내고 정수해 온 물을 끓여 신라면 하나를 허겁지겁 먹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Wildman과 Mamagoose가 등장했다. 이 둘이 물을 정수하는 동안 스트레칭을 하며 뭉친 근육을 풀고 있으니 Wildman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터프한 하루였어 허! 안 그래 친구? 조금만 더 가면 텐트를 칠만한 넓은 공간이 나올 텐데 함께 할래?"
어차피 텐트 칠 곳을 찾아야 했기에 이 둘과 함께 하기로 하고는 따라나섰다.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짧은 시간에 서로 장난도 칠 정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길은 그런 마법이 통하는 곳이었다. Wildman은 해병대, Mamagoose는 공군을 전역한 전직 군인들이었다. 이 둘은 이미 전직 군인들이 모여 만든 'Warrior Hiker'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서로를 알게 된 건 PCT를 시작하고 'Lake Isabella'를 지날 때쯤이었다고 했다. 난 한국에서 왔고 혼자 PCT를 시작했다고 하니 Mamagoose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떡볶이라고 했다. 깜짝 놀라 매운 음식인데 괜찮더냐고 물었더니 매운 걸 좋아해서 자기 입에 딱 맞아 너무 맛있게 먹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내 도착한 숙영지에서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이 둘을 위해 피 같은 식량이지만 신라면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텐트를 치고 내가 준 신라면을 바로 끓여 먹어 본 Mamagoose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Mamagoose는 텐트에서 자고, 나와 Wildman은 그냥 카우보이 캠핑을 하기로 했다. 밤하늘에는 이미 수많은 별들이 나무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기에 오늘 밤은 별에 취해 잠이 들고 싶었다.
자기 전 Wildman이 내일이면 도착할 'Chester'에 Thunder bunny와 Chef가 Cabin을 빌렸다고 하는데 같이 갈 거냐 물었다. 'Chester'는 PCT의 Mid-point를 지난 후 만나는 첫 마을이었지만, 이미 보급품을 'Belden'에서 받은 난 들릴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2,600mi 중 1,300mi을 걷고도 축하파티도 하지 않고 혼자만 계속 간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또 트레일에서 'Chester'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히치하이킹을 해야만 가능했기에 여러모로 번거로울 거라 판단하고 제외를 시킨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하이커들이 축하를 하기 위해 'Chester'로 모인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졌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OK. 한마디로 답을 하고는 고생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축! Mid-point 돌파!!
Datebook을 기준으로 정확히 1,326.9mi 지점에 위치한 Halfway Maker를 7월 16일 오후 1시경 Wildman과 함께 지나왔다. 다리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하는 Mamagoose와는 속도가 맞이 않아 순간을 함께 하진 못했다. 아침 일찍 6시쯤에 출발해 약 7시간을 걸어왔다.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벌써 중간지점을 지나게 되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참을 그곳에서 쉬었다. 기념 촬영도 하고, 마치 종주를 끝낸듯한 기분으로 뒤따라 도착하는 하이커들에게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30분이 넘는 시간을 서로를 축하하며 보내다 Thunder bunny가 기다리고 있을 'Chester'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이후 'Chester'로 향하는 길은 8mi의 내리막 길이었지만, 'Belden'으로 향하는 내리막 길에서와는 달리 오늘은 Wildman과 신나게 뛰면서 내려왔다. 'Chester'로 빠지는 Highway에 두 시간도 채 안 걸려 도착하니 도로 건너편에 트레일 매직이 있는 게 보였다. Thunder bunny와 통화를 하고 시원한 콜라로 목을 축이며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꼬마 아이 셋이 있는 일가족이 탄 차가 한대 서더니 고생했다며 감자칩과 맥주를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꼬마애들이 너무 예뻐 한번 안아주고 싶었지만 온 몸에 땀냄새가 배어 있어 참기로 했다. 미국은 정말 하이커들에겐 천국인 나라인 듯했다.
곧이어 Thunder bunny가 탄 밴 한대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처음엔 이들이 Cabin을 빌렸다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Wildman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연이 좀 길었는데, Thunder bunny의 친구가 앞서 PCT를 걷고 있었고 이 곳에 들렀을 때 마을의 한 Pub에서 Kari라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PCT Hiker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했더니 '네가 원한다면 우리 집에서 묵어도 된다'며 자신을 초대했는데, 이미 이 곳에 있는 Angel house인 'Piper`s mom'이라는 곳에 묵고 있었기에 감사의 마음만 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후에 자신의 친구인 Thunder bunny가 이 곳을 들릴 건데 그때 그 친구를 초대해주겠냐는 말에 흔쾌히 Kari가 응하고 연락처를 건네줘서 이렇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연을 다 듣고 나서는 Thunder bunny와 함께 우리를 태우러 와 준 Kari의 남편인 Sean에게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악수를 청했다.
트레일에서 꽤나 벗어난 곳에 위치한 'Chester'라는 마을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전형적인 미 서부의 작은 마을과 비슷했다. 길게 늘어선 주택들 가운데 앞마당에 큼직한 캠핑카가 서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산불 소방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Sean은 예전에 한 주먹 했을 정도로 우람한 체격이었지만,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만큼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잠은 집안이나 캠핑카에서 자도 되고 텐트를 칠 거면 뒷마당에서 쳐도 된다며 화장실부터 시작해 샤워실, 주방까지 집안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Kary는 아직 근무 중이라 집에 없었지만, 아들인 Owen과 딸 Brenah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일단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는 맥주를 마시며 Sean과 여러 얘기를 나눴다. 백패킹은 물론 바이크까지 취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는 나와 Wildman을 데리고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 안쪽엔 BMW 앰블럼이 박힌 바이크 두대가 위용을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Sean의 얼굴을 보니 얼마나 아끼는 것들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Mama goose와 Chef가 도착했다는 연락에 Sean이 픽업을 갔고,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Kari와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눴다. Trail angel도 아닌데 우리를 이렇게 맞이해주고 환대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니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라면서 천사 같은 미소를 우리에게 지어주었다. 딸 Brenah도 엄마 아빠의 이런 심성을 물려받았는지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돌리느라 갈아입을 옷이 없는 Thunder bunny와 Mama goose에게 자기가 입는 옷까지 빌려주기도 했다. 오늘 처음 만난 우리를 마치 가까운 친척같이 맞아주는 이들 가족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 날 우리는 이 아름다운 가족들과, 그리고 우리뿐 아니라 오늘 'Chester'에 도착한 Phish, 오랜만에 만난 Hoho, Chicory, Alpaca 등 총 20명이나 되는 하이커들이 모여 Mid-point를 지난 것을 다 함께 축하하는 파티를 벌였다. 치킨 스테이크에 샐러드, 케이크, 쿠키에 과일, 맥주는 물론 와인이며.. 중요한 것은 이날 우리가 먹고 마신 모든 것들을 Kari와 Sean이 제공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Angel house에서 지낼 때처럼 당연히 도네이션을 하겠다 생각했지만, 이들 부부는 극구 사양하며 끝내 우리에게 아무것도 받지를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호의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던 그 순간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겠지만, 다시 한번 Kari와 Sean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리를 맞이해 주셔서..."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