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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Oct 12. 2016

Wildman


 



 나는 야간에 운행하는 것을 싫어했다.


 몸이 힘들거나 다른 신체적인 이유보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마냥 걷기만 해야 하는 게 싫었다. 지난 이틀 동안 계속된 야간 운행은 그런 면에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한참을 걷다 고개를 들었을 때 힘든 걸 잊을 정도로 가슴이 확 트이는 광경 혹은 울창한 숲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게 좋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걷긴 했지만 걷는 내내 오늘이 지나면 다신 못 볼 것만 같은 이 길의 풍경이 못내 아쉬웠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도착한 호숫가 근처의 Campsite에서 늦은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두 다리를 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 텐트 대신 대충 그라운드시트만 깔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호수의 모습은 마치 싱그러운 교향곡을 듣는 것처럼 화사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호수에 비친 아침 햇살이 반영되어 내 눈을 살포시 간지럽혔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지만,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는지 옆에서 자고 있던 Phish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야, 그렇지?"




< 산 중턱에 이런 호수가 있다는게 신기했다. 하룻밤 묵었던 호수를 뒤로 하고 다시 가야 할 길을 오르면서... >
< 친구들이 보내 준 티셔츠가 조금 작아 팔 부분을 뜯어내 나시티로 만들었다. 왠지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서핑을 하지 않는데도 'Shaka'를 외쳐야만 할 거 같았다. >

 



 어제 늦은 시간까지 걸었기에 피곤할 만도 했지만, 눈이 즐거운 아침 풍경 덕분인지 어느새 피로가 다 풀려 몸이 개운했다. 아침식사로 늘 먹던 그라놀라가 없어 대신 산 시리얼은 맛이 꽝이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아쉬움에 커피 한잔하며 호숫가를 돌아본 후 다시 길을 나섰다. 


 "Mama goose와 다른 아가씨들은 잘 오고 있는 거야?"


 휴대폰이 먹통이라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그나마 통신사가 Verizon인 Wildman에게 그녀들의 근황을 물어봤다. 정확히 하루 정도 차이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으니 아마 'Etna'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얘기했다.


 "계속 연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오버"


 "롸져 댓"


 전직 미 해병대 출신의 Wildman과의 대화는 주로 군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말투로 대화를 했다. 그도 재미있어했고, 나 역시 식상하지 않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영화를 좋아하고, 주로 미국 드라마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봐 왔던 터라, 그가 말하는 용어나 단어들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Wildman에게 딱 하나 궁금한 게 있었다. 그는 마을을 들릴 때마다 항상 아무것도 사질 않았다. 맥주 한 캔 아쉬울 때도 많았을 텐데 그는 결코 한 캔의 맥주도 사서 마시질 않았다. 담배도 물론, 내가 보기에 Wildman은 헤비 스모커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갑의 담배도 사질 않았다. 줄곧 내가 산 담배를 나눠 피거나 운 좋게 하이커 박스에서 구한 담배를 피기만 할 뿐이었다. 보급품도 한번 찾지를 않았고, 식량은 항상 하이커 박스에서 유일하게 보급받고 있었다. 무슨 연유가 있는지 알 순 없었지만 항상 그게 궁금했다. 지금까진 짧은 영어라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물어볼 순 없었지만 이번 마을에 들리면 한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30mi을 걸었다.

 저녁 8시 반이 넘어 어두컴컴 해지길래 오늘은 야간 운행을 하기가 싫어 그만 걷기로 했다. 셋 다 피곤함을 느꼈는지 능선을 타고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는 곳에 자리를 펴고는 잠을 청했다. 춥기도 추웠지만 그래서인지 잠이 더 쏟아졌기 때문이다. 




< 숨은 Phish 찾기. 파란 하늘에 흩날리는 새하얀 구름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길을 걷는 하이커들. >




 밤새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굴이 탱탱 부어있었다. 산능성이라 바람을 막아 줄 것이 없어 세찬 바람을 직격탄으로 맞으며 밤을 지새운 것이었다. 텐트라도 치고 잤음 나았을 건데 그것마저 귀찮을 정도로 피곤했었나 보다.


 어제 많이 걸어서 오늘은 약 14mi 정도만 운행하면 'Etna'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낮은 동산을 여러 번 올랐다 내려야 했지만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오후 한시쯤 'Etna'로 빠질 수 있는 Highway 3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라 그런지 한참을 도로가에서 차가 오나 살펴봤지만 차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햇빛은 강하게 내리쬐는데 아스팔트라 반사되는 열 때문에 덥기도 하고, 해를 가려줄 만한 것도 주변에 없어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긍정을 잃지 않는 하이커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말고도 Wiki라는 닉네임의 어린 친구와 그의 엄마 Pig tail, 그리고 처음 본 남자 하이커 셋이 더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지루할 만도 한 시간을 돌과 나무막대를 이용해 야구도 하고 웃으면서 보낼 수가 있었다. 


 낡은 밴 한대가 우리 쪽에 와서 서길래 '아 이제 갈 수 있겠구나' 했지만, 차 안은 짐으로 가득했고 그나마 빈 앞자석은 얄미운 개 한 마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밴에서 내린 아주머니께서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며 대신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맥주를 우리에게 하나씩 건네주기도 했다. 또 우리가 담배가 다 떨어진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건네주신 담배 덕분에 일말의 스트레스도 날려 보낼 수가 있었다. 가뭄의 단비였다. 




< Traffic이 거의 없는 Highway 3.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건 오직 모자가 드리워 준 그늘 뿐이었다. 열일곱 Wiki와 그의 엄마 Pig tail. >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3시간을 더 이렇게 보낸 후에야 우리는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타고 어렵게 'Etna'로 향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을 땡볕에서 고생한 걸 보상이라도 하듯, 도착하자마자 수소문을 해서 알게 된 마을의 유명한 햄버거 집인 'Dotti`s burger로 직행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우리는 홀로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Mama goose를 만나게 되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내일 도착할 걸로 예상했던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게 궁금해 물어보니, 'Burney state park'에서 늦게 출발했지만 이상하게 다리가 안 좋아 다시 돌아가게 되었고, T-bunnz, Chef 그리고 Chef의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더 보내고 때마침 근처를 바이크로 여행하던 Sean과 연락이 닿아 이 곳까지 태워줬다고 했다. Sean이 그곳에 있었던 것도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한 일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다시 그녀를 보게 되니 너무 반가웠다.


 Mama goose는 마을에 있는 모텔을 잡았다고 했지만, 우린 Wifi가 되는 동네 도서관 앞에서 스텔스 캠핑을 하기로 했다. 햄버거로 배를 불리고 난 후 필요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마켓을 들렀다. 이 곳에는 보급품을 보내지 않았기에 다음 목적지 'Seiad valley'까지의 약 이틀 분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틀만 먹으면 되는 식량을 사러 간 마켓에서 난 무려 $50가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마켓만 가면 정신 못 차리는 건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마찬가지였는지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충동구매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낀 모텔비로 산거라 생각을 하니 마음은 편안해졌다.




< 햄버거와 밀크쉐이크의 조합은 칼로리는 물론 맛까지 보장된 하이커들을 위한 훌륭한 한끼 식사꺼리이다.  >




 Wildman이 마을에서 뭘 안 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Wildman은 전역 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는데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자세히 말을 할 순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약간의 문제가 있어 갑자기 계좌에서 돈이 인출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중에 해결되면 갚으라고 $100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괜한 참견일 수도 있었지만 그가 혼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해 없이 내 호의를 받아 주었고, 우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더니, 오밤중에 도서관으로 경찰이 순찰을 나오는 바람에 우린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절한 경찰은 우리에게 하루 묵을 곳을 안내해주었고, 그의 안내대로 찾아간 마을 공원 벤치에서 밤 12시가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T-bunnz와 Chef를 기다릴 겸 오늘은 마을 관광을 하기로 했다. 

 아침은 페스츄리가 특히 맛있다는 카페에서 커피를 원 없이 마셨고, 오후에는 이 마을의 Brewery에서 맥주를 한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잠깐 통화를 하고 돌아온 Mama goose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오늘이 9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여동생의 기일이었던 걸 깜박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연락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계산을 하고 나와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결국 그녀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흐느끼는 그녀를 우린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그녀의 슬픔을 한동안 같이 나누어 주었다.


 피부색이 다른 친구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오늘 함께 나눈 그 시간 때문인지 우린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 곳으로 올 줄만 알았던 T-bunnz와 Chef가 바로 트레일로 들어선다고 연락이 와 우리도 다시 트레일로 복귀하기로 했다. 마을을 들리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맥주와 와인 그리고 약간의 먹을거리를 준비했고, 이내 Highway 3에서 다시 만난 거지 꼴의 그녀들을 반가움에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맨 땅에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한 조각 치즈에 와인을 이들과 함께 나눠 마시는 시간이 잘 꾸며진 식당에서 비싼 음식들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최고의 안주는 함께하는 좋은 벗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밤이었다.

 



< 우리는 다시 함께 할 수 있었다. 땀과 먼지에 찌든 그녀와 그래도 얼굴은 씻고 온 우리의 모습이 참 대비되는 사진이다. >

 



 맥주와 와인에 취기가 올라 잠든 사이, 무언가가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울어대고 있었다.


 "일어나! 곰이야!"


 지금부터는 곰통이 필수가 아니었기에 무게를 줄이려고 상기형한테 보낸 터라 식량을 방수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날은 나무에 걸어놓지도 않고 배낭 옆에 그냥 내버려 둔 채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냄새를 맡은 걸까? 곰이라고 외친 T-bunnz에게 어디서 곰을 봤냐고 물어보니, 아직도 놀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녀는 자고 있는데 무언가가 자기 뺨을 핥았다고 했다. 그게 곰이었는지 뭐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곰이 아닌 이상 사람한테까지 다가와 그런 짓을 할 용감한 동물은 이 주변에 없을 듯했다. 이미 트레일에서 마운틴 라이온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던 T-bunnz와 Chef였기에 그녀의 말을 그냥 무시할 순 없었다.


 오밤중에 푸드백을 나무에 매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는 해가 뜨자마자 빠르게 짐을 꾸리고 이동을 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서 다행이긴 했지만 덕분에 잠을 설쳐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를 배려라도 하듯 짙은 스모그가 해를 가려주니 그나마 덥지 않은 걸음을 할 수는 있었다.


 아직 다리가 불편한 T-bunnz와 Chef의 걸음이 느리기도 했고 어젯밤 일로 다들 잠이 부족했었기에 호수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는 한동안 낮잠을 자기로 했다. 그동안 씻을 수 없었던 T-bunnz와 Chef는 마치 목욕이라도 할 기세로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런 모습을 마치 물장난하는 어린 딸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아버지처럼 바라보며 우리는 잠이 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유쾌한 친구들 덕분에 매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다.




< 발목이 불편했던 T-bunnz를 위해 압박붕대를 갈아주고 있는 Phish의 모습. 다정한 오빠같은 그의 뒷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




 오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오후 6시가 넘어서니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부터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곧 우리가 있는 곳에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아 그전에 오늘 묵을 만한 곳을 찾기로 하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작은 계곡을 건너 굽어지는 길을 지나니 왠 낡은 Cabin이 트레일 옆에 거짓말처럼 떡하니 서있는 게 아닌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Cabin이라 약간 으스스해 보이기도 했지만, 곧 쏟아질 비를 생각하니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었다.


 마치 옛날 공포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통나무집과 정말 비슷했다.

 안에는 퀴퀴한 나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사방에 거미줄이 쳐져 있어 더욱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짐승을 해체할 때 사용했을법한 테이블도 한쪽엔 놓여 있었고 그 위엔 큼직한 도끼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그런지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여기가 내 자리니 저기가 내 자리니 자리싸움을 시작했다. 예전 공포영화에서 이런 곳을 봤다는 내 얘기에 다들 맞장구를 치면서 오늘 같은 밤은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 제맛이라며 애써 웃음일 보이기도 했다.


 밤은 깊어가고 하나 둘 침낭 안으로 몸을 눕혔다.

 이윽고 Phish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시작된 무서운 이야기. 어떤 내용인지는 알겠지만, 그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간간히 터져 나오는 Chef의 비명소리가 어느 정도 무서운 이야기 인지를 대신 얘기해주고 있었다. 점점 더 분위기가 고조되고, Chef는 물론 T-bunnz와 Wildman의 비명소리도 들리기 시작할 때 나는 속으로 감사했다.


 오늘 밤, 나의 짧은 영어실력이 나를 이 무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음을...







< 자기가 본 영화의 모습을 재현해 보겠다던 T-bunnz의 모습. >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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