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비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예상대로 간밤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내리치는 천둥번개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뤘다. 만약 집이었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무섭지도 않았을 텐데, 막아줄게 하나도 없는 오픈된 공간에서 마주치는 이런 순간은 정말 아찔했다. 얼마나 가까운 곳에 번개가 떨어졌는지 번쩍하는 동시에 '콰쾅'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가녀린 텐트 하나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마저도 없었으면 아마 물에 빠진 생쥐처럼 다 젖어서 어딘가 쪼그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이 길을 걸으며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이라도 조금만 견뎌내면 시간은 알아서 간다는 것이었다.
길고 길었던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새파란 하늘이 아침을 열어주었다. 해가 너무 좋아 텐트를 말리고 갈까 하다가, 먼저 출발한 Wildman과 Phish를 따라잡기 위해 서둘기로 했다. 텐트야 점심 먹을 때 말릴 수 있으니까. 아마도 앞으로 36mi 지점에 위치한 'Ash campground'에서 오늘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36mi의 산 길을 하루에 걷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플로 확인 한 고도표를 보니 Up & Down이 별로 없어 그리 어려울 거 같진 않았다.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지나 시야가 확 트이는 능선에 오르니 저 멀리 Mt. Shasta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우뚝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 북쪽과 오레곤 주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Mt. Shasta는 해발 약 4,320m로 캘리포니아 15 고봉 중 5번째로 높은 산이다.
"산을 보는 순간 내 몸속의 피가 붉은 와인으로 변했다"
환경보호 운동가였던 John muir가 Mt. Shasta 보고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영험이 깃든 명산이었다. '하얀 산'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사계절 내내 정상에는 눈이 덮여 있지만, 올해는 가뭄이 극심해 많이 녹아 있는 듯 보였다. 우리나라의 한라산이나 일본의 후지산처럼 주변에 다른 산이 없어 왠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지나온 'Chester'의 한 펍에서는 Mt. Shasta를 오른 사진을 보여주면 크래프트 비어 한잔을 공짜로 주기도 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산이기도 했다.
아침을 시리얼만 먹어서인지 배가 고파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 텐트를 말리기 좋은 장소를 찾고는 텐트가 잘 마르도록 펼쳐놓고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는데, 오래간만에 먹는 너구리가 왜 이리 매운지 먹는 내내 매워서 혼이 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아무런 매운맛도 못 느꼈던 너구리였는데, 역시 매운 것도 안 먹다 보니 입맛이 변했나 보다. 괜히 매운 걸 먹어서인지 걷는 내내 속이 불편해 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 가지고 있던 물이 다 바닥난 줄도 모르고 마신 바람에 7mi을 물 없이 침만 삼키며 걸었는데, 나중에는 침까지 말라서 너무 힘들었다. 왜 사람이 밥은 안 먹어도 물은 꼭 마셔야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있을 정도로 온 몸이 말라 가는 듯한 고통을 참기는 정말 힘들었다.
정말 죽을 듯 걸어 겨우 도착한 Creek은 트레일 옆에 있는 게 아니라 갈림길로 몇백 미터를 더 들어가야 찾을 수가 있는데, Creek으로 가는 갈림길에 어디서 많이 본 배낭이 두 개 놓여 있었다. Wildman과 Phish의 배낭이었다. 이들은 내가 따라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귀엽게도 마른땅에 화살표를 그리고 도착한 시간을 표시해두었다.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된 이들을 만나기도 전에 반가운 건 왜일까? 그새 많은 정이 들었는지 힘든 것도 잊고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요 프렌!! 왜 이제 온 거야? 어제 널 기다렸는데"
"아 그래? 어디서 잤길래? 난 너네가 일찍 출발해 어제 마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알고 보니 내가 텐트를 쳤던 곳에서 2mi도 안 되는 지점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일찍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만난 반가움에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제사 내가 목이 말랐다는 걸 느끼고는 얼른 정수기를 꺼내서 물을 정수했다. 차갑고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며 말라있던 세포 하나하나를 다시 깨웠다.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때로는 당연한 거라 느꼈던 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없으면 안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늘 우리 곁에 있으니 그게 당연하다 생각되었던 것이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동안 바쁘단 핑계로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던 가족들. 언제든 가기만 하면 반겨주겠지 했던 가족들이었는데, 만약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깨닫고 찾아간다 해도 이미 그때는 늦어버렸을 테지. 꼭 이럴 때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우리 막내! 하도 소식이 없어서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지~"
미안해요 엄마.
"잠깐, 오지 마!"
갑자기 Phish가 우리를 향해 낮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앞을 봤더니 작은 새끼곰 한 마리가 우리 바로 앞에서 나무를 오르려 하는 게 보였다. 물론 아직 새끼곰이라 크게 위협될 게 없었지만, 어미곰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만약 새끼곰이 우리 앞에 있고, 어미가 우리 뒤에서 나타나 우리가 샌드위치로 끼인 상황이 되게 되면 그때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게 뻔했다. 우리는 새끼곰을 해할 의도가 없다고 해도, 어미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자기 새끼를 위협하는 인간 무리로만 생각하고는 본능적인 모성애가 작용해 사력을 다해 우리를 뒤쫓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이 이쁜이, 얼른 저리 가 저리.."
우리가 신기한지 오르던 나무에서 내려와 멀뚱멀뚱 우리만 쳐다보는 새끼곰을 향해 나지막한 소리로 달래듯이 말해봤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곰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겁이 없는 건지 정말 우리가 신기해서인지 조금씩 다가오려는 새끼곰을 향해 우리는 뒷걸음질 치면서 돌을 던졌다. 상황이 겁이 나기도 했지만, 새끼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기기도 했다. 한참을 뒷걸음질 치면서 트레킹 폴을 부딪혀 쇳소리도 내고 작은 돌을 던졌다. 다행히 거부감을 나타내는 우리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비탈길을 쉭하고 뛰어 올라갔다. 그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고는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었고, 새끼곰이 시야에서 안 보일 때쯤 나는 새끼곰이 달려간 방향으로 크게 소리쳤다.
"Please, don`t call your mother!!"
오늘은 정말 무기력하면서도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아침도 여유 있게 든든히 먹었고, 걷는 길도 단조로워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점심도 시원한 계곡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먹으며 몸이 지치지 않도록 낮잠을 자기도 했다. 충분히 쉬어서 컨디션도 괜찮았는데, 점심 이후 조금 경사가 높은 산을 하나 넘는데 이상하게 온 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고 힘이 빠지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그늘이 많이 진 길이라 그리 더운 것도 아니었고, 경사가 높긴 해도 못 오를 만한 것도 아니었는데 희한하게도 몸이 말을 듣질 않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걸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자꾸만 주저앉으려고 하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1,500mi을 걸어왔지만, 다른 이물질이 내 몸에 들어와 고생시킨 경험 말고는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다리에 힘을 주고는 애써 몸을 움직이려 하는데, 갑자기 앞이 하얘지더니 현기증까지 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쓰러지다시피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워워워 케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뒤따라 오던 Wildman이 달려와 내 배낭을 벗겼다. 앞서가던 Phish도 Wildman의 소리에 놀라 황급히 내게로 와서는 내 머리를 만져보았다. 식은땀 때문에 온 몸이 젖어 있었고, 나는 알지 못하지만 눈동자도 풀려있었는지 예사롭지 않은 내 모습에 바로 차가운 물을 먹이고는 자기 배낭에서 누텔라를 꺼내 크게 한술 떠 내 입에 넣어주었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고 머리에 물을 좀 뿌리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 느껴졌다. 평소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남정네 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니 약간은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Phish의 누텔라를 두 스푼 더 떠먹고, 배낭에서 단백질 파우더를 꺼내 물에 태워 마시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제 괜찮아졌다는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일어섰다. 뭣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알 순 없지만, 만약 그때 이 친구들이 없었고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이럴 땐 혼자가 아닌 게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여유를 너무 부린 데다 나 때문에 시간이 더 지체되어 오늘은 야간 운행까지 하고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원래 'Castella'에서 7mi 정도 못 간 지점에 Campground가 있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트레일 옆에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텐트를 칠 곳이라곤 찾을 수가 없는 곳이라 부득이 조금 더 운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한 시간을 더 가서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비포장도로를 만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겨우 카우보이 캠핑을 할 수 있었다. 경사가 약간 진 곳이라 불편하긴 했지만,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였다.
이 길이 끝나면 가장 힘들었던 하루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날이 되겠지.
'Castella'로 향하는 길은 고작 5mi 남짓되는 거리. 거기다 가는 길 주변에 야생 라즈베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한참을 배낭을 내려놓고 말도 없이 라즈베리를 따 먹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분명 비타민이 부족해 어제 현기증이 났을 거야"
'Castella'를 코 앞에 두고 두 손이 시퍼렇게 물들고 이가 다 파래질 정도로 라즈베리를 따먹고 있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모처럼 비타민을 풍족하게 섭취하고 나서야 다시 길을 나섰다. 이윽고 도착한 'Castella'에서 난 잠시 멍하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이라고만 생각했던 'Castella'는 그냥 Gas station일 뿐이었고, 옆에 우체국 하나만 달랑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Gas station 안에 있는 Store에서 보급품을 보관해주었기에 창문 안으로 보이는 Store 한편에는 아직 찾아가지 않은 보급품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기형이 보낸 배낭과 이 곳으로 보낸 보급품 두 박스를 찾아야 했는데, 우체국이 11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조금 기다려야만 했다. 쉬면 뭐해 먹어야지! 어제 일을 겪고 나서 자기 전,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Store에서 파는 'Breakfast Brito'와 큼직한 스낵을 다들 하나씩 사서는 우체국 앞 그늘에 조르륵 앉아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다 큰 남자 세명이 한 손엔 Brito, 가랑이 사이엔 스낵 봉지를 놓고 양손을 번갈아가며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웃음이 날 정도로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우체국 직원의 실수로 이미 와 있는 박스를 못 찾아 아직 도착 안 했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4시간이나 허비하고서야 보급품을 받을 수가 있었다. 늘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만 봐 왔기에 오늘 만난 불친절하고 업무적인 우체국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도 그럴만한 게 수도 없이 많은 하이커들이 하이킹 시즌이 되면 매일같이 방문해 똑같은 일만 반복해야 하니 당연히 업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그냥 그려려니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나를 기다려주느라 4시간을 멍 때린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과 맥주 한 병씩 돌리고는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다시 트레일로 복귀했다.
배낭을 다시 경량 배낭으로 바꿨다. 짐도 많이 줄어 기본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았기에 굳이 무거운 프레임 배낭을 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 친구 효석이가 자기 일도 아닌데 나를 위해 여기저기서 물품을 지원받아 보내주기도 했다. 이 곳에 오기 전 기우와 산호랑 함께 운영했던 "Midnight picnic' 로고가 프린트된 티셔츠와 모자, 성곤이 형이 보내 준 SNRD의 선글라스 외에도 라면이며 소주, 고추참치 등 보기만 해도 흐뭇한 선물들이 박스에 담겨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친구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는 자몽 소주? 인가를 보내주고 싶어, 찾고 찾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게 없어 그냥 병소주를 보냈다. 당연히 배송 중에 병이 다 깨져서 우체국에 짐을 찾으러 간 주영 선배가 곤혹스러운 상황이 일어나기도...
'효석아! 마음만 받을게!'
다시 트레일로 향하는 길에 그냥 지나치기가 뭣 할 정도로 수영하기 딱 좋은 강이 흐르고 있어, 다리 밑에서 시원하게 수영도 한번 해주고는 트레일로 복귀했다. 오늘은 효석이와 주영 선배님 덕분에 모처럼 소주를 한잔 할 수 있었다. 병째로 소주를 돌려 마시고는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맛이 아주 달고 깔끔하다며 둘 다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쓰다고 생각했던 소주 맛이 오늘은 정말 달콤했다.
다른 안주도 필요 없이 그냥 이 친구들과 길 위에서 한잔 나눈 소주 맛이, 예전 느꼈던 맛과는 다르게 아주 달콤했다.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