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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Oct 13. 2016

캘리포니아여 안녕!





 "두두두두두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너편 산 위로 빨간 소방 헬기가 힘찬 엔진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Phish가 건조한 기후 탓에 항상 이 맘 때쯤엔 산불과의 전쟁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어젯밤의 낙뢰가 저 산불의 주범일 거라 말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트레일 옆에 있는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는 물을 정수하러 호수로 향하던 중, 갑자기 '두두두' 거리는 헬기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잔잔한 호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저 너머로 보던 소방헬기가 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우리가 있는 호수까지 온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힘내라는 박수와 함께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산불 자체도 문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산불로 인해 트레일이 닫혀버리는 게 더 큰 문제이기도 했다. 트레일이 위치한 구역에 산불이 발생되면 복구가 될 때까지 트레일은 닫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닫힌 구간을 우회하는 루트를 찾던지 아니면 그냥 뛰어넘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들 틈만 나면 PCTA 공식 사이트에서 트레일 현황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우리가 진행해야 하는 구간 중에는 닫힌 구간이 없었지만, 워싱턴 주에 큰 산불이 나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의 보급품이 우체국에 있기 때문에 금요일인 오늘 'Seiad Valley'에 도착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주말을 그곳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던 것이었는데, 점심을 먹은 곳에 휴대폰 안테나가 떠서 우체국으로 연락을 할 수 있었고 다행히 보급품을 마을에 있는 Store로 옮길 수가 있었다. 미국의 우편시스템은 정말 잘되어 있는 듯했다. 특히 트레일에서의 그 활용도도 아주 높았다.


 나는 출발 전 전 일정의 보급품을 미리 준비해놓았고, 준비된 보급품을 내가 세운 계획대로 주영 선배님께서 날짜에 맞춰 보내주고 계셨는데 막상 트레일을 진행하다 보니 꼭 누군가의 도움이 필수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체국을 이용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식량을 보급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마을에는 큰 마트가 있었기 때문에 식량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만약 앞으로 진행할 구간의 마을에 식량을 구입할 만한 데가 없다면 그 전 마을에서 우체국을 이용해 미리 사서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마트나 우체국이 없더라도 보급품을 보관해주는 곳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막얀 다시 한번 내가 이런 장거리 트레일을 도전하게 된다면 그때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귀곡산장에서 맞이한 아침.  퀴퀴한 냄새 때문에 안에서 아침을 먹을 수는 없었다. >
< 전날 낙뢰로 발생한 산불. 이제부터가 산불 시즌이기 때문에 매일 트레일 현황을 확인 해야만 했다. >



 점심을 먹고 오른 짧은 오르막 이후 'Seiad valley'까지 남은 길은 다 내리막이었다.

 오전까진 짙은 스모그로 우중충한 하늘이 계속되었는데 오후부터는 파아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비록 산불로 인해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마치 에덴동산을 걷는듯한 기분이 느껴졌었던 오늘 트레일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Seiad valley'에 도착하기 7mi 전 지점에 위치한 Campground에서 숙영을 하기로 하고는 계속 길을 걸었다. 흐르는 계곡에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가 갑자기 내린 비에 옷이며 배낭이며 홀딱 다 젖기도 했다. 젖은 몸으로 보슬보슬 내리는 빗속을 걸으니 온 다리에 흙이 묻어 되려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Campground 옆에도 강이 흐르고 있어 다시 씻을 수 있긴 했지만, 날이 저문 뒤 차가운 물에 몸을 씻으려니 온 몸이 어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Etna'에서 만난 Wiki와 그의 어머니도 함께 동행했었다. 아직 17살 밖에 안된 나이로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엄마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그와, 그런 그가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지해 준 엄마의 모습은 한국에선 보기 힘든 그런 모습이었다. 나도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애를 가지게 되면, 애가 하고자 하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 줄 수 있을까? 생각이야 할 수 있겠지만, 막상 애를 낳고 키우다 보면 그의 인생에 내 욕심도 어느 정도 반영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결혼을 할 것인가? 가 아닐까 싶다.


 


 "오~ 맨~ 적당히 하고 출발하지 그래? 이러다가 여기서 하루 더 지내겠는데?"


 마치 무언가에 홀려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연신 길가에 난 라즈베리만 따고 있는 나와 Phish, Chef를 보고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 Wildman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30분째 가던 길을 멈추고 라즈베리를 따는 일에만 몰두를 하고 있었다. 참다 참다 인내심이 다 한 Wildman과 T-bunnz가 먼저 출발하고 나서도 우리는 라즈베리를 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고, 손 끝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각각 물통 두 개씩을 라즈베리로 꽉 채우고 나서야 우리는 멈췄던 길을 다시 나설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라즈베리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그만큼 비타민이 부족하기도 했고, 인위적이지 않은 달달한 그 맛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Wildman과 T-bunnz가 출발하고 30분이 더 지난 후에 출발한 우리는 라즈베리를 딴다고 시간을 보낸 것도 모자라 'Seiad valley'로 향하는 큰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길가에 배낭을 벗어두고는 수영을 하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이 포이즌 오크로 뒤덮여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속옷만 입은 채로 돌진했다. 모처럼 물속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비버도 갑자기 출현한 우리로 인해 쉴 곳을 잃고는 시끄러움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나 할 거 없이 물 만난 고기처럼 첨벙첨벙 물속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꼭 동네 개구쟁이처럼 못 말리는 혈기왕성한 하이커들이었다.




< 수많은 라즈베리를 남겨두고 가긴 너무 아쉬워 우리는 각각 가지고 있던 빈 물통을 두병씩 꽉 채운 후에야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
< 보랏빛 향기가 아닌 보랏빛 손바닥. 라즈베리를 따는데 집중하느라 손가락이 물들고 있다는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Seiad valley'는 마을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커뮤니티에 가까웠다. 아마도 근처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따로 있는 듯 우리가 도착 한 곳에는 작은 Store와 Cafe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왜 이제 왔냐며 핀잔을 주는 Wildman과 함께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Cafe로 들어갔다. 우리 말고도 Gentle giant와 42, Whisper도 점심을 함께 했다.


 Cafe에서는 'Pancake challenge'라고 정해진 시간 내 Pancake을 다 먹으면 공짜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5 Pound나 되는 어마어마한 Pancake의 양에 다들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가소롭다는 듯 노장의 힘을 보여준다며 Gentle giant가 도전을 했다. 결과는?? 역시나 실패. 두장을 겨우 먹고는 혀를 내두르며 더 이상은 무리라고 포기를 했다. 사실 두장을 먹은 것도 대단할 정도로 Pancake의 양이 무시무시했다.


 Gentle giant 덕분에 즐거웠던 식사를 끝내고, 다들 보급품을 찾아 Cafe 옆 공터에서 정리를 했다. 근처에 잘만한 곳이 없나 둘러봤지만 도로 주변이라 그런지 찾기가 힘들었다. 우리끼리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Store의 주인아저씨가 와서는 여기서 한 15분 정도 숲길을 차로 가면 넓은 공터와 자연 풀장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차로 태워줄 수 있으니 갈 사람은 30분 뒤에 이 곳에 있으라고 했다.


 "역시 마법 가득한 이 길에선 안 되는 게 없어!"


 공짜로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자연 풀장까지 있다는 말에 우리는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트레일로 돌아간다는 Gentle giant만 빼고 42와 Whisper까지 함께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차로 이동했다. 덜컹거리는 트럭의 뒷칸에 앉아 약 10분 정도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달려 도착한 곳은 아저씨 말대로 텐트를 10동은 칠만한 공간에 옆에 계곡까지 흐르고 있는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아저씨는 정확히 내일 새벽 6시에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기곤 다시 Store로 돌아가셨고, 우리는 바로 각자 잡은 자리에 배낭을 내려두고는 옷을 벗어던지며 자연 풀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계곡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한층 뜨거워진 분위기 덕분에 추운 줄도 모르고 다이빙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옆에 있는 통나무를 타고 마치 워터슬라이드를 타듯 계곡을 내려오기도 했고, 사온 맥주를 마시며 다들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모든 고민과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 때묻지 않은 웃음이 이어져 또 하나의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시간들.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는 하루를 살고 싶다는 내 모토처럼, 지금 나는 잘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지만, 돌이켜 추억할만한 가치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만큼 소중한 시간을 나는 이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 비록 실패했지만 노장의 위엄을 보여준 Gentle giant의 'Pancake challenge'. 다들 신기했는지 연신 눌러대는 셔터소리가 마치 기자회견장을 방불케 했다. >
< 워터슬라이드는 저리가랏! 통나무계곡슬라이드가 여기 나가신다! 몇번의 실패 끝에 뒤집어지지 않고 끝까지 내려 온 Whisper >
< 해병대 출신이라 뭔가 좀 다른걸 보여주나 싶었는데 정확히 저대로 철푸덕 빠져버린 Wildman. 이 계곡에서 보낸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었다. >




 'Seiad valley'를 떠나 이틀간 약 50mi을 걸어 캘리포니아와 오레곤의 주 경계선에 도착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캘리포니아가 끝이 난 것이다.


 뜨거운 태양과 타는듯한 갈증, 물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힘들었던 사막이 그리워질 것이다. 하루에 한두 개의 높은 Pass를 오르고 내려야만 했던 Sierra의 그 웅장한 풍경들도 기억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앞으로 걷게 될 오레곤과 워싱턴은 또 어떤 멋진 풍경과 즐거움을 선사해줄지 기대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1,700mi을 울고 웃으며 정들었던 캘리포니아를 떠난다는 게 아쉽기도 했다.


 'Seiad valley'에서부터 함께 지냈던 42와 Whisper, Gentle giant 그리고 다시 만난 Wiki와 Pig tail. 기념사진을 찍자는 42의 말에 다들 쑥스러워했지만, 카메라의 타이머가 돌아가자 이내 웃음꽃 활짝 핀 익살스러운 얼굴로 포즈를 취했다. 이때를 위해 T-bunnz가 준비한 데낄라로 무사히 캘리포니아를 지나왔음을 축하하는 건배를 올리면서 PCT로 함께 이어진 인연을 감사해했다.


 경계선을 넘어 조금 더 걸은 후에 다 함께 모여 잘 수 있을만한 공간에서 카우보이 캠핑을 하기로 했다. 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는데, 우여곡절 많았던 캘리포니아에서의 삼 개월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스르륵 펼쳐졌다.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소중했던 순간들...

 이 곳에 오기 전 사진으로만 봐 왔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던 길이었기에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곳에 오겠다는 결심을 하고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난 눈에 보이는 그 사진만으로 이 길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그 사진에선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더 큰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무언가가 말이다.

 







< 캘리포니아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주 경계선에서 한컷. >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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