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lmost ther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ol K Oct 25. 2016

Hiker Box Gang




 Hiker Box Gang




 언제부턴가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Chester에서 함께 제로데이를 가진 것을 인연으로 나와 Wildman, T-bunnz, Chef, Mamagoose 그리고 Phish까지 이렇게 여섯 명이 뭉쳐 걷기 시작한 것이 HBG의 시작이었다. 캘리포니아 구간이 끝나고 오레곤으로 들어와 Ashland를 지나며 42와 Vulture, Wiki까지 합류하는 것으로 HBG는 완전체가 되었다.


 왜 하필 Hiker Box Gang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Wildman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식량을 하이커 박스에서 구하는 Wildman을 위해 언제부턴가 나와 Phish는 우체국에서 찾은 보급품 중 일부를 Wildman에게 주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하이커 박스를 함께 뒤졌다. 아무리 하이커 박스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늘 질 좋은 것들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Wildman이 부담 갖지 않도록 같은 메뉴는 질려서 못 먹겠다는 이유로 내가 가진 건조 식량을 건네곤 했다. 그러면서 T-bunnz와 Chef까지 본인 보급품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마을에 들리면 일단 서로의 보급품을 찾아 나누고는 하이커 박스를 뒤진 후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마트에서 보충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하이커 박스를 뒤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고, 남는 식량이 있으면 하이커 박스에 담아두기도 했다. 우리보다 식량이 더 필요한 다른 하이커들을 위해서...


 그렇게 다 같이 하이커 박스를 뒤지는 모습이 흡사 전리품을 탐하는 갱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우리를 Hiker Box Gang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트레일을 시작한 지도 중반이 넘어선 시점이었기에 길에서 마주치는 하이커들은 대충 다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트레일 패밀리라 부르며 지낼 만큼 사이가 각별했다. Section Hiker였던 Wiki의 엄마, Pig tail이 Ashland를 끝으로 트레일을 떠나며 우리에게 Wiki를 잘 부탁한다고 맡겼기 때문에 막내인 17살 Wiki를 기준으로 Wildman이 아빠, T-bunnz가 엄마 그리고 나와 42, Chef가 삼촌과 이모, Mamagoose와 Phish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었다. 사실 Wiki가 가장 어리긴 했어도 Wikipedia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똑똑해 우리 중에서 가장 의젓하고 논리적인 친구였다. 애 같지 않은 애어른이랄까? 간혹 우리끼리 농담을 주고받을 때 그 주제에 대해 Wiki가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을 하기 시작할 때는 마치 로봇처럼 말하는 Wiki의 모습에 진짜 로봇일지도 모른다며 웃옷을 걷어 올려 전원 버튼을 찾기도 했었다.


 한국인 한 명에 미국인 여덟 명의 하이커 그룹. 미국인들 틈에 끼어 어색할 만도 할 조합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그런 관계가 되었다. 언어소통도 내 수준의 영어로 늘 얘기해주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하루 종일 함께 했던 시간 덕분에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California의 웅장함과는 달리 Oregon은 포근한 느낌이었다. Oregon의 첫 마을 Ashland로 향하는 길에서. >




 Oregon의 첫 마을인 Ashland에서의 이틀은 아주 유쾌한 시간이었다. 트레일과 이어져 있는 Callahan`s lodge에서 하이커들에게만 주는 무료 맥주 쿠폰으로 시원하게 맥주를 한잔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햄버거를 먹고는 Ashland로 향했다. 고속도로로 이어진 곳이라 히치하이킹을 하기에 애를 먹긴 했지만 무사히 차를 얻어 타고 Ashland로 들어갈 수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42와 Phish는 동네 식당에서 옆 테이블의 마을 사람이 밥값을 계산해주었다며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Ashland는 그렇게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서던오리건주립대학교(1826)가 위치해 있어서 있을 건 다 있었다. 지금은 방학기간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방학이 끝나는 시기에는 젊은 사람들로 거리가 넘쳐나는 생기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인원이 많았기에 우리는 인근 모텔에서 방을 두 개를 잡고 함께 셰어 하기로 했다. 이 곳에서 남자 친구인 Vulture를 만나기로 한 Chef를 위해 그 두 명이 한방을 쓰고 나머지는 다른 방에서 끼어 자기로 했다. 아쉽게도 좋은 의도로 나눈 방은 술이 챈 Whisper가 그들의 방에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 Chef의 남자 친구 Vulture는 Chef와 함께 트레일을 시작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사막에서 멈추고 지금까지 쉬다가 이곳으로 점프를 했다고 했다. T-bunnz 말로는 사막에서 헤어진 이후로 Chef와 사이가 소원해져 솔직히 지금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어서인지 그 이후로 괜히 둘 사이를 관찰하게 되었다.


 Powerthight와 Origami도 이 곳에서 만나 광란의 밤을 함께 보냈다. 모텔 인근의 타코를 먹으며 조용히 시작한 술 한잔이 2차로 인근 Pub에서 술집을 뒤흔들 정도로 요란하게 게임과 다트를 하며 즐겼고, 것도 모자라 클럽으로 옮겨 폭탄주를 다들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걸로 마무리 지을 수가 있었다. 술이 흥건히 오른 Whisper는 도로 가에 세워진 표지판에 올라 폴댄스까지 추면서 에너지를 분출했고, 모텔에 와서는 덥다며 그 새벽에 수영장에서 옷을 입은 채로 다이빙까지 했다고 했다. 피곤해서 먼저 들어온 나와 42는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지만, 그 정도가 된 Whisper를 안 본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젖은 채로 방을 잘못 들어가 Chef와 Vulture를 위해 준비한 방에서 그대로 곯아 떨어져 셋이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아침에서야 듣게 되었다. 역시 지구촌 어디나 술 마시면 돌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 Whisper도 역시 술을 안 마셨을 때에는 연구원 타입의 조용한 친구였기 때문에 어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 Pretzle이 시작한 'Tototoyotapcthubcap'을 Chef가 'Callahan`s lodge에서 이어 받았다. >
< 2차로 간 Pub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카드게임을 시작으로 우리는 광란의 밤을 보내게 되었다. >
< 한 방을 나눠써도 불편한게 없었던 Trail family 'HBG'. 이전에는 혼자서 모텔비를 다 내야했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




 큰 파도가 한번 몰아치고 난 후의 조용한 해변처럼 고요한 아침, 잠이 덜 깬 얼굴로 쑥스러운 듯 우리 방으로 조용히 들어오는 Whisper를 향해 큰 박수를 치는 것으로 Whisper의 이별식을 대신했다. 점심을 이 곳에서 먹고 출발하기로 하고는 오전 동안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마트에서 장도 보고,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며 여유를 부리다 보급품을 찾기 위해 들린 우체국에서 이름이 Kim이 아닌 Lim으로 잘못 표기되어 찾는데 30분이나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짐을 꾸리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Ashland를 끝으로 PCT를 마치고 Colorado Trail을 시작한다는 Whisper의 배려로 그의 렌터카를 타고 편히 트레일로 복귀할 수 있었다. Whisper는 이미 두 번이나 PCT를 종주한 경험이 있는 친구였기에 종주에 큰 미련이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중 하나인 Colorado Trail로 향하는 그를 마지막으로 진하게 포옹한 뒤 우린 다시 길을 나섰다. 5mi 정도 길을 걷다 Wiki가 먼저 잡아놓은 자리의 경치가 너무 좋기에 오늘은 이 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는 사이트 옆으로 보이는 작은 언덕을 오르기도 하면서 Ashland에서 묻은 진한 알코올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텐트를 친 터라 문을 활짝 열어두고는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이 무거워 가져갈까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읽고 싶었던 책이라 한국에 있는 동호형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받은 책이었다.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이 쓴 유명한 애팔란치아 트레일 종주기인 '나를 부르는 숲'이었는데,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 졌을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트레일에서 책을 읽으니 나도 내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많은 곳을 다니면서 블로그에만 글을 올렸지만 항상 무슨 일이 생겨서 마무리를 지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꼭 내가 길을 걸으며 느낀 생각과 경험들을 엮어서 글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과연 내 이름으로 쓰인 책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기분이 묘할 것만 같았다.




< 렌트카를 찾으러 간 Whisper를 기다리는 동안 잠이 들어버린 T-bunnz. 사실 이 친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드러누워 잠을 잘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
< 비교적 이른 시간에 캠프를 한터라 시간이 많이 남아 앞에 보이는 작은 언덕을 오르기도 했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

 


 

 확실히 시야가 트인 곳이라 그런지 밤새 강한 바람이 괴롭혔다는데, 나는 텐트를 치고 잔 덕분인지 그런 바람 속에서도 깨지 않고 푹 잘 수가 있었다. 아침으로 그라놀라와 Chef가 준 베이글에 치즈크림을 얹어 커피와 함께 우아하게 먹고는 출발했다.


 오레곤은 역시 평평했다. 물론 낮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긴 했지만, 이전 걸었던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길이 확실히 수월했다. 길이 수월한 만큼 걷는 속도가 빨라서인지 중간중간 호수가 나오면 짐을 내려놓고 수영도 하면서 여유롭게 걸었는데도 26mi을 걸었다. 그래서 다들 오레곤은 빠르게 지나친다고들 했다. 하루에 40mi에서 많게는 45mi씩 걸어 오레곤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끝을 내는 'Oregon Challenge'를 시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굳이 빨리 걸을 필요가 없었기에 오레곤의 숲이 주는 피톤치드를 흠뻑 마시며 여유로운 걸음을 하기로 했다. 지나고 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을 괜히 힘까지 빼면서 빨리 걷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남은 거리를 볼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아쉬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예정된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부분은 아직 준비하기가 싫었고 할 수 있을까란 자신감도 들지가 않았다.




< 쉬는 도중 서로의 상의를 바꿔입자는 T-bunnz의 제안을 쿨하게 받아들이고는 기념샷까지 찍은 42의 모습 >




 트레일에 위치한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 도착해 우리끼리만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Wiki의 보조배터리가 사라졌다는 비보가 들렸다. 충전을 시키기 위해 공중화장실에 둔 보조배터리가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도로 근처의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그 이야길 하니 Phish도 젊은 친구 세명이 새벽부터 어슬렁 거렸다는 얘기를 했다. 아무리 보조배터리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트레일 중에 있는 하이커의 물건을 가져간다는 게 참 안타깝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범인에게 들리지도 않는 메아리를 친들 뭣하랴 하면서 그냥 Wiki를 위로해주었다. 얼굴이 울상이 되어버린 Wiki는 필요하면 언제든 빌려준다는 우리들의 말에 애써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새 보조배터리를 주문하기 위해 쓸쓸히 Amazon을 뒤지기 시작했다.


 T-bunnz의 발이 계속 말썽인듯했다. 이미 다리가 불편했던 Mama goose는 우리와 속도를 맞추기 힘들어 혼자 점프를 해가면서 힘겨운 걸음을 하고 있었는데, T-bunnz 역시 아픈 발목으로는 우리 속도에 맞춰 걷는 게 힘이 들었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침부터 뒤로 처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우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쉘터에서 오늘 야영을 하고 내일 다시 출발한다고 Wildman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침에 캠핑장을 떠날 때 괜찮냐는 내 물음에 활짝 웃으며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을 해야 될 정도로 아픈 모양이다. 이미 발목 때문에 시작할 때부터 고생을 해 본 나였으니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Vulture의 발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트레일을 시작한 지 이제 삼일 정도 되었는데, 예전에 부상당했던 부위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고 했다. 급한 대로 발목에 압박붕대를 감고 걷기는 했는데 걷는 걸음걸이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사실 우리는 Vulture의 다리보다는 Chef와의 관계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커플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커플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이 두 친구들을 보며 나뿐 아니라 Phish나 42, Wildman까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특히 42가 Chef에게 호감이 있는 듯 보여 둘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라면 스킨십을 못해 안달일 텐데 이들은 키스는커녕 손을 잡기도 꺼려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Vulture는 원하는 눈치였으나 Chef가 완강한 태도를 고집하는 듯 보였다. Ashland에서 술이 취한 채로 잠깐 얘길 나눌 때 Vulture에게는 더 이상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를 얼핏 지나가며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내면 지낼수록 내가 미국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게 맞나 할 정도로 이들의 관심사는 우리와 똑같았다. 노는 거라던지 이성관계라던지.. 정말 어딜 가나 주된 화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은 것 같았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창 피 끓는 청춘인 남녀가 힘들고 고된 길을 함께 걸으며 몇 개월씩이나 동행을 하는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끌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린 혹시나 발생될 수 있는 Chef와 Vulture, 42 이들의 삼각관계에 대해 예의주시 하면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 식사시간은 항상 정겹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먹는 저녁식사는 오늘 걸은 트레일의 느낌이나 서로의 몸 상태를 묻고 체크하는 등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의식과도 같았다. >
< 물론 걷는 도중 맞이하는 휴식시간에는 막힌 코를 뚫어주는 작업도 잊어서는 안된다. >




 미국 본토에서 가장 깊은 호수라는 'Crater lake'에 가까워지자 다들 들뜨기 시작했다. 원래 관광코스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그 아름다운 호수를 둘러볼 수 있는 'Rim Trail'이 이 구간의 묘미 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산불 때문에 그 주변의 트레일이 닫힐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Crater lake'에 도착할 때까지 노심초사하며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트레일이 닫힌다면 그 이후의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현재로써는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Crater lake'에 가까워질수록 스모크로 인해 짙어지는 하늘색과 퀴퀴한 냄새가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 석양이 진다. >










< To be continue... >



매거진의 이전글 캘리포니아여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