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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Nov 08. 2016

우연이 만들어 준 인연




 "요~!! HBG!!!"


 난데없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큰 키에 눌러쓴 모자 밖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낮은 저음 특유의 목소리, 바로 Phish였다. Shelter cove resort에서 헤어진 후 이젠 못 볼 거라 생각했던 Phish의 등장에 난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우리가 있는 곳은 마을도 아닌 Elk lake로 가는 트레일 중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Bend에서 휴대폰을 바꾸고 트레일을 거꾸로 걸어 내려오다 요 앞 트레일 바닥에 너네가 표시해 둔 HBG 글씨를 보고 찾았지"


 나와 42가 이른 아침에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점심 먹을 위치를 뒤따라 오는 친구들에게 알려주려고 트레일 바닥에 HBG라고 크게 써놓은걸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뜬금없는 장소에서 Phish를 다시 보게 된 게 너무 반가웠다. 덕분에 우리는 넓은 호수 옆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 함께 수영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점심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앞으로 어쩔 거냐는 우리의 물음에 Shelter cove resort까지 거꾸로 내려가 못 마친 부분을 다 걸은 후에 다시 히치하이킹으로 Bend까지 와서 트레일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기 전 Bend에서 Clutch 패밀리를 또 만났는데, Elk lake에서 며칠 머무를 거라 했다면서 가는 길에 들리라는 얘기도 남겼다. 




< 햇살이 살포시 스며들어 편안함 가득한 오레곤의 숲길을 걸었다. 때로는 웅장한 경관 보다도 이런 안락함이 더 오래 기억되기도 했다. >




 나는 먼저 길을 떠나신 또 다른 한 분의 한국인 PCT 하이커이신 윤은중 어르신이 Elk lake의 어느 장소에 내게 남긴 선물을 가지러 꼭 들려야만 했다.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에 혼자 다녀와도 된다고 했지만, 거기서 보급품도 찾아야 되고 또 노는 게 좋은 이 친구들은 전부 다 가겠다며 말을 거들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꼭 다시 보자는 인사로 Phish를 먼저 보내고 난 후 우리도 짐을 챙겨 다시 길을 나섰다. Elk lake까지는 10mi도 남지 않은 거리였기에 몇 시간만 걸으면 될 것만 같았는데 아마 오후 4~5시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윤은중 어르신의 따님께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이 와 아버지가 받은 짐이 너무 많아 김이랑 고추장 등 한국음식 몇 가지를 Elk lake의 어느 지점에 묻어 놓으셨으니 잘 찾아서 맛있게 먹으라고 내게 알려주라고 하셨단다. 


 ' 1958mi Elk에 오시면 상점 나와 우측 수도 주유기에서 3~4미터 걸어가면  아스팔트 삼거리 보임. 삼거리에서 똑바로 보면 작은 길이 또 보임. 비포장 두 번째 나무 옆 바위 밑 흙 걷어내면 아스팔트 쪼가리 얹어놨음. 고추장, 김 커피, 된장 분말 등'


 묻어 둔 위치도 마치 보물 찾기를 해야 하듯이 재미있게 남겨주셔서 왠지 모르게 기대감과 함께 흥분이 되었다. 윤은중 어르신은 이미 AT를 종주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하이커이셨는데, 영어를 잘 못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직접 보여주시기도 한 대단한 분이셨다. PCT와 위스키 딱 두 마디의 영어만으로 PCT를 종주 중에 계시는 어르신을 꼭 한번 뵙고 싶었지만, 일찍 출발하시기도 했고 내가 노느라 마을에서 쉬는 날이 많았기에 아마도 트레일에서는 뵐 수가 없을 듯했다. 대신 그 아쉬움을 트레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한번 찾아뵙고 막걸리를 한잔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지 하며 대신했다.


 어렵지 않은 길을 신나게 걸어 도착한 Elk lake는 역시 관광지답게 드넓은 호수에서 카약이나 수영, 선탠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구로부터 이어지는 도로 양 옆에 마련된 캠핑장에는 가족단위로 휴양을 온 캠핑족들이 이미 휴식을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Clutch 패밀리도 입구 바로 옆 사이트에 머물고 있었기에 도착하자마자 만날 수가 있었rh, 역시나 우리가 오는 걸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며 사이트로 초대를 해주었다.


 한창 타코 요리에 분주한 Clutch 패밀리 사이트에 짐을 풀어놓고는 어르신이 남긴 보물을 찾으러 스토어 쪽으로 내려갔다. 상점  앞에 위치한 주유기를 찾아 말씀 주신대로 따라가 보니 누가 먼저 이곳을 다녀갔는지 땅이 파헤쳐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위치를 파악해봤지만 이곳이 정확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흔적이 있는 걸 보고는 넣어둔 보물을 가져간 듯 보였고, 옆에는 어르신이 남기셨을 분말커피의 껍데기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 사진을 찍어 어르신의 따님께 메신저로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는 힘 빠진 걸음으로 사이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몰라도 한글로 쪽지까지 남겨두셨을 건데 하이커끼리의 우정을 파괴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르신이 알려주신 위치를 정확히 찾았지만, 누군가 먼저 발견하고는 흔적만 남긴채 어르신이 남긴 보물을 가져가 버렸다. >




 "타코 좀 들지? 쿨케이"


 아쉬움에 어깨가 축 처져있는 내게 Clutch의 삼촌이 다가와 준비된 타코와 아이스박스에서 금방 꺼낸 시원한 맥주를 건넸다. T-bunnz는 보급품을 찾으러 갔고, 다른 친구들은 스토어 옆에 있는 바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며 홀로 남아있던 Wiki와 함께 타코를 먹으며 자리를 지켰다. Clutch 패밀리는 Clutch의 사촌 두 명과 삼촌, 숙모 총 4인 가족이었는데, Clutch가 PCT를 시작하기 전부터 캠핑카로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Clutch가 PCT를 시작한다고 하자, 이미 계획에 있던 미국 서부여행을 위해 Clutch의 서포터를 자청해서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캠핑카 뒤에는 미국 전도가 그려져 있었고 다니는 곳마다 색깔을 칠해두고 있었는데, 아마도 Clutch의 PCT가 끝날쯤에는 그들의 지도에도 색깔이 다 칠해질 것 같았다. 


 Clutch 패밀리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다른 하이커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 아래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헐래 벌떡 뛰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T-bunnz였다. 그냥 걸어오면 되지 왜 이리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냐고 웃으며 얘기하니, 보급품을 찾고 Wildman이랑 42가 있는 바에 갔는데 Chef와 Vulture도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색한 분위기의 넷 사이에 끼어 햄버거를 먹다 Phish를 만난 이야기를 하는데, 바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Bend란 마을 이름을 듣더니 자기 테이블로 와서 PCT하이커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자기를 Dr.Chip이라고 소개하며 자신도 작년에 PCT를 종주했고 집이 Bend에 있는데 혹시 Bend에 들릴 예정이면 자기 집에서 지내도 좋다고 했다. 거기다 Ashland에서 헤어진 Whisper와도 함께 종주하며 친해진 사이라고 하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며 당장 Bend 가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뜬금없고 예정에도 없는 Bend로 가자니 이게 웬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42와 Wildman은 물론 Chef와 Vulture까지 나타나 Wiki와 나한테 짐을 챙기라며 서둘기 시작했다. 곧이어 낡은 밴 한대가 사이트 앞에 서더니 Dr.Chip이라는 젊은 친구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좋아 좋아.. 가자고 가. 근데 한차로 이 인원이 다 움직일 수 있단 말이야?"


 "충분히 탈 수 있지~ 오예 레츠고!!"


 이 낡은 밴에 운전자를 빼고 일곱 명이 배낭까지 실은 채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42의 대답에 나는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구겨지듯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간 후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낭은 뒤편에 다 실고 앞좌석에 Wildman과 T-bunnz, 뒷좌석에 Vulture랑 Chef, 42랑 Wiki 그리고 내가 구겨져 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기에 Clutch 패밀리와 다른 하이커들은 죽는다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었다.


 "사랑해요 Clutch 패밀리! 트레일에서 다시 만나요!!"


 포옹 한번 할 시간도 없이 차 안에 구겨진 채 열린 창문 틈새로 소리치듯 인사를 전하고 우리는 Bend로 향했다.




< 가는 곳마다 신세를 지게되는 Clutch 패밀리. 너무나 친절한 이분들 덕분에 Clutch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서포트를 받는 듯 했다. >
< 1명의 운전수와 7명의 하이커, 그리고 7개의 배낭을 모두 실은채 달릴 수 있었던 마법과도 같은 Dr.Chip의 낡은 밴 >




 느지막이 도착한 Bend는 꽤나 큰 도시였다. 해가 곧 질 시간이라 도시 구경은 내일 하기로 하고는 Dr.Chip의 집에 짐을 내려놓고 인근에 위치한 Pub으로 향했다.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좋다. PCT라는 트레일이 너무 좋은 건 아마도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예전에 콜로라도 트레일이나 존 뮤어 트레일을 종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쏜다! 가자!"


 한껏 흥이 올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던 42가 갑자기 뒤로 돌아와 우리에게 고백하듯 수줍게 얘길 했다. 42가 쏜다는 말에 우리도 덩달아 흥이 나서는 Dr.Chip이 데리고 간 Pub에서 신나게 우리만의 파티를 즐겼다. 맥주를 마시며 테이블에 앉은 채로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농담에 미친 듯 웃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그 순간을 즐겼다. 


 나에게는 매 순간이 정말 소중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트레일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의 집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뿐 아니라 Pub에서 나와 집에서 2차를 하자며 냉동피자와 맥주를 사러 편의점을 들렀는데, 그곳에서 만난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우리가 PCT를 종주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맥주로 응원해주고 싶다며 한 박스를 그 자리에서 사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의 연결고리는 PCT라는 트레일 밖에 없었다. 나는 나라도,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국인이기도 했고, 물론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이 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과 들리는 마을마다 하이커라는 이유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트레일이 위치한 미국에 사는 이들에게도 PCT와 같은 장거리 하이킹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장거리 하이킹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고, 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준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트레일을 걸으며 만났던 트레일 엔젤들이나 트레일 매직, 트레일에서 지나칠 때마다 고생한다며 뭐라도 조금 나눠주려고 했던 데이 하이커들, 그리고 마을 레스토랑에서 파이팅하라며 밥값을 대신 내어주시는 마을 주민분들까지 모두가 단지 우리가 PCT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베풀어 주신 친절을 직접 겪고 나니 더욱더 이들의 하이킹 문화 아니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 가지고 있는 문화가 부러워졌다.


 너무도 부러웠지만, 지금은 내가 그것을 받고 있고 또 즐기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2차에 마실거리를 준비하기위해 들린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그룹의 선물을 Wildman이 소중히 안고 있다. >
< 엉겁결에 폰으로 찍은 셀피라 화질이 엉망이지만, 추한 내 얼굴과 대비되는 예쁜 미국인 처자의 얼굴은 화질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아름답다. >




 Bend에서 보낸 시간들은 색다른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전날 흥이 너무 과한 나머지 과음을 하게 되어 얼굴이 탱탱 붓고 술이 덜 깬 채로 술냄새를 풍기며 다들 Rei에서 쇼핑도 하고 보급을 위해 마트에 들려 장을 보기도 했다. 떠나야 할 시간에 Chef와 42가 보이지 않고 연락도 안되어 화가 난 Vulture만 남겨두고 우리 넷만 히치하이킹이 가능한 곳까지 Dr.Chip이 데려다주었는데, 알고 보니 둘이서 신발을 사러 갔다 바에서 술을 마신다고 연락이 안 되었던 것이었다. Wiki를 통해 문자메시지로 42와 상황을 주고받았는데, 그 일 때문에 Vulture가 엄청 화가 났고 일단은 내일 트레일로 복귀하겠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히치하이킹이 너무 안돼서 그냥 도로 옆에서 잘까 하는 순간에 어디선가 히피 같은 아가씨 두 명이 탄 차가 극적으로 나타나 우리를 Elk lake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애들은 오레곤 국경을 함께 넘은 Sunshine과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이 넓은 미국 땅에서 이런 우연을 이틀 연속으로 겪어보니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이런 우연이 또 인연이 되는 거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흥이 넘치고 우여곡절 많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어둠이 깔려 컴컴한 도로를 지나 Elk lake에서 트레일로 이어지는 사이드 트레일 옆 한적한 공간에 하루 묵을 자리를 펼쳤다. T-bunnz, Wildman, Wiki 그리고 나. 떠날 때와 돌아올 때의 사람 수는 달랐지만, 우린 차라리 잘됐다며 남은 세 사람이 알아서 잘 정리하고 오기만을 기대하면서 뜨거웠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과연 또 내일은 어떤 익사이팅한 일들이 벌어질까?'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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