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er Springs에만 도착하면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적어도 그곳에 도착하기 5분 전까지만 해도…
오전 10시도 채 안되어 도착한 Warner Springs는 번번한 마켓도 하나 없는 그냥 학교 앞 공터에 위치한 주민센터 같은 곳이었다.
가이드북을 통해 이미 체크는 했지만, 이 정도로 삭막할 줄은 몰랐다. 건물 앞 공터에는 커다란 Oak Tree 두 그루가 있었고, 이 곳에서 유일하게 그늘이 드리워진 이 나무 아래가 하이커들을 위한 무료 캠핑장인 듯했다. 나처럼 이제 막 도착한 하이커 말고도 전날 도착해 이미 캠프를 하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하이커들도 많이 보였다.
일단은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같은 분위기에 여러 테이블이 놓인 이 공간은 마치 하이커들을 위한 사랑방 같았다. 꼬질꼬질한 하이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랑방 한쪽 구석에 다행히도 작은 선반을 놓고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스낵과 음료를 파는 미니 마켓(?)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맥주는 보이지가 않았다. 뜨거운 사막을 지나면서 늘 생각했던 것이 차가운 샤워 후에 마시는 한잔의 시원한 맥주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맥주는 보이지 않았고, 맥주를 마시는 하이커 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바로 앞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커뮤니케이션센터란 이름 하에 공공장소로 분류되어서 그런지 이 곳에서는 술을 못 마시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아쉽지만 악법도 법인지라 게토레이와 사과 세 개를 사들고 배낭을 둔 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 Eagle rock. 바위의 모습이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 닮아 붙여진 이름. Waner springs로 가기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유명한 포토존이다. >
PCT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식일이라 이것저것 할 게 엄청 많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뭘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오늘 캠프할 명당을 잡아야 하니, 나무 그늘 가장 좋은 자리에 텐트를 펼치고는 짐을 풀었다.
다들 우체국에서 찾아온 소포를 펼쳐놓고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우체국은 보이질 않았다. 옆에 만사 귀찮다는 듯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누워 낮잠을 청하고 있는 하이커에게 눈치도 없이 물어보니, 역시나 귀찮다는 듯 ‘저기로 가서 저기로 가면 있을 거야’라고 웅얼거리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놈 말만 믿고 걸어 간 게 화근일까? 우체국은 이 곳에서 약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오겠지 하며 계속 걸어간 나는 결국 그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3-40분가량 걸어 가서야 마침내 우체국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커뮤니케이션 센터나 현지 경찰들이 하이커들을 위해 우체국까지 무료로 셔틀 운행을 해주고 있었다.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누굴 탓할 수 있으랴! 그래도 큼직한 보급상자를 받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건조 식량, 건조 식량… 육포, 또 건조 식량…
보급을 받아 기분은 좋았지만, 문제는 식량의 구성이었다. 이미 뜨거운 사막을 경험했던 터라 이 식량 구성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뭔가 이 상황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곳의 유일한 마트는 커뮤니케이션 안에 있는 구멍가게! 그곳에서 파는 물건만으로 식량을 대체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이것 또한 내 잘못인 것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영어라도 잘 하면 아무나 붙잡고 신세한탄이나 해볼 텐데.. 답답한 마음에 빨래나 하려고 세탁실로 가보니, 내가 무슨 마가 끼었는지 잘 돌아가던 세탁기마저 문제가 있다면서 손빨래를 해야 한단다.
다리는 아프지,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건 없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 건조식과 라면, 알파미 등 화기를 사용해야만 먹을 수 있는 식량 구성은 뜨거운 사막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가 필요했다.>
잠이나 자자.
그래도 태양만 피하면 시원한 이 곳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그늘 밑 설치 해 둔 텐트 안에 누워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으려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너 한국에서 왔니?’
막 들려고 하는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일어나 보니, 텐트 메쉬 사이로 보이는 웬 여자애가 나를 향해 얘기하고 있었다.
빅뱅, 특히 탑을 좋아해 5월 1일에 발표되는 신곡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이 미국 여자애는 Kate라는 친구로 smile & miles, 줄여서 S&M이란 트레일 네임의 PCT를 종주하기 위해 이곳에 온 27(?) 살 처자였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며 내민 책 한 권 분량의 프린트된 한국어 교재는 역시나 앞에서 세네 장까지만 공부한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수줍게 얘기하는 ‘안녕하세요’라는 한국말은 내 귀를 간지럽히기에 충분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하나의 공통된 주제, 그것도 내 나라 내 조국을 주제로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것이 앞으로 긴 여정을 함께 할 kate와의 첫 만남이었다.
< S&M, 빅뱅의 탑을 좋아하는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 시작할 때 만나서 트레일이 끝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이다. >
쉬면 나아질 줄 알았던 발목이 저녁이 되도록 가라앉기는커녕, 더 부어 오른 듯했다. 발갛게 닳아 오른 것을 보니 염증이 생긴 듯한데, 진통제 말고는 조치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내일 일어나면 조금 더 나아졌기만을 바라며 다음 보급지인 Idyllwild에 가서 다른 방도를 찾을 수밖에..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뭔가 아쉬운 마음에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생각한 warner springs에서의 휴식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근데 어쩌면 이게 맞는 것이고, 내가 잘못 생각한 것 일수도 있다. 내가 누워 있는 이 곳은 네온사인이 새벽까지 맞아주는 한국의 도심이 아닌, PCT 그중에서도 황량한 캘리포니아 사막의 시작점이니까…
이상과 현실 사이는,
역시나 냉정과 열정사이 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커뮤니케이션 센터이다. 작은 건물 안에 하이커들을 위한 테이블, 충전기, 무료 커피와 작은 스낵을 구매할 수 있는 스낵바가 있다. >
< 이 곳에서 유일하게 캠프를 할 수 있는 커다란 oak tree 아래에는 수많은 하이커들이 짐을 풀고 휴식하고 있다. 물론 무료이다. >
< 부어 오른 오른쪽 발등과 발목. 무릎보다 오히려 발목이 걱정되기 시작했었다 >
다음날 아침.
간밤에 통증으로 잠을 설쳤더니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눈은 떠 있었지만,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싫었다. 한참을 뒹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8시가 넘었고, 벌써 떠났거나 떠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다른 하이커들을 보고 있자니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나서자.’
조금이라도 힘을 더 내볼까 해서 보급받은 날 먹기 위해 보냈던 고추참치를 꺼내 지난밤 남겨둔 식은 밥에 비벼 한술 들었다.
공터 옆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들어와 서더니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내린다. 두 명은 하이킹을 할 준비를 하기 위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고, 한 명은 그들을 배웅하러 왔는지 물끄러미 그 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 명은 젊고, 한 명은 늙은 걸 보니 이들은 부자관계 인 듯했다. 어려서부터 가족 단위로 아웃도어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런 장거리 트레일도 가족들과 함께 하는구나...
보기만 해도 흐뭇한 광경에 내심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와 산에 가본지가 언제였던가? 대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 번씩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일요일 아침은 아버지와 동네 뒷산에 함께 오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도 잘 안 내려가고, 내려간다 해도 늦잠을 자느라 그 잠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마저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주도로 온 가족이 자칼 텐트 들고 여름마다 계곡으로 놀러 가 캠핑을 했던 경험 덕분에 밖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게 익숙한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지나고 나면 이렇게 후회할 걸, 왜 그땐 모르고 지냈던 건지... 집 나오면 효자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후회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짐을 정리했다.
9시가 되어서야 길을 나섰고, 배낭을 다시 메고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warner springs에서 idyllwild까지는 약 70 mile. 지금 상태로는 4일 정도 걸릴 듯했다. 일단 그 중간 50 mile 지점에 위치한 paradise cafe라는 하이커들에게 오아시스라 불리는 카페가 첫 번째 목적지.
아침부터 햇살이 무섭게 내리쬐었지만, 길을 걷는 자를 붙잡을 순 없는 법. 그늘 하나 없는 사막의 한없이 펼쳐져 있었고, 서서히 오르는 온도에 사막이라는 걸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걷고 있고, 꿈에 그리던 이 길..
인터넷이나 영화에서만 봐왔던 이 길..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길 위에 서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길을 걷고 있는 건지 나 조차도 궁금해졌다. 뭐 다 이유가 있겠지.
타는 듯한 갈증에 끊어질 듯 아픈 두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러면서도 웃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하다.
지금 당장은 모를지라도, 아마 이 길의 끝에 설 때쯤이면 알 수 있겠지.
< Warner springs의 아침. 우측에 보이는 아버지의 아들. 함께 배낭 메고 하이킹하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
작은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이 끝나자마자, 하염없이 오름질이 시작된다. 스위치백으로 올라가는 길이지만, 이 더위 속에서 하루에 두세 번씩 산을 오르락 내리면 몸이 금방 너덜너덜 해지는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 몸을 쉬어야 할 때는 할 수없이 우산을 이용해 그늘을 만들어야만 조금이나마 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침 이후에 먹은 게 없어 열량 보충을 위해 다 녹은 초코바를 두어 개 짜 먹고는 몸을 식혔다. 덥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데다 파리는 자꾸 앵앵거리며 성가시게 하니 쉬는 것도 쉬는 게 아닌 듯했다. 외국 애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찌나 잘도 자는지..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한 가 보다.
십여분 앉아있지도 못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흐르는 땀에 셔츠며, 바지며, 배낭 등판할 것 없이 다 젖었다. 이런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뜨거운 모래에서 쉬고 있는 도마뱀이 내 인기척에 흠칫 놀라며 왜 방해하냐는 듯 눈을 흘기고는 이내 내빼버린다. 오후 3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갈 길은 먼데 걸음걸음은 추를 메어놓은 듯 무겁기만 했고, 오른쪽 발등부터 발목까지 통증이 안 느껴지는 곳이 없다.
<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막의 트레일. 찌는 듯한 더위에 오르막까지 올라야 하니 체온이 올라 그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
< 주위를 둘러봐도 잠시 쉬었다 갈만한 그늘 진 공간 하나 찾을 수가 없다. >
다리를 질질 끌듯 가다 보니 비포장도로가 나왔고, 트레일 에인절의 집이 근처에 있으니 들렀다 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통증도 잊고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에는 kick-off에 참가해서 하이커들에게 브리또를 나눠줬던 트레일 에인절 부부의 집이 있었다.
벌써 이 곳엔 찰스, 케이트는 물론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던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코바로만 연명했던 하루였는데.. 로스트 치킨에 포테이토, 팬케익, 거기다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시원한 캔맥주까지!! 게눈 감추듯 손으로 싹싹 긁어먹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맥주 한 캔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건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가지고 있던 현금 중에서 5불을 기부하고 여기 있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Idyllwild로 가는 길에 이전에 났던 산불 때문에 통제된 구간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지점은 모르겠지만, 대부분 Paradise cafe에서 히치하이킹으로 Idyllwild로 바로 간다는 걸 보니 그즈음인 듯했다.
시간이 더 늦음 안될듯해서 트레일 에인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약 2 mile 정도 걸었을까? 어느덧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고, 다리도 더는 안 되겠는지 통증으로 그만 가라는 말을 전하길래 트레일 옆에 그냥 평평한 곳을 골라 텐트를 쳤다.
< 지치고 힘든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 트레일 에인절의 사랑! 원샷할 수밖에 없었던 맥주는 가히 최고였다. >
< 자외선에 노출되어 타 버린 팔은 징그럽게도 수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
< 일흔이 넘은 듯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젊은 친구들보다도 튼튼해 보이는 T-rex >
< PCT에서의 캠핑은 위급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기존에 만들어진 텐트사이트에서만 캠핑을 한다. 자연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룰이랄까? >
오늘 캠프 메이트는 T-rex.
거의 일흔이 다 된 이 할아버지는 다른 젊은 친구들보다 머리는 하얗게 새었지만,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는 듯했다. 자신이 티라노사우르스 만큼 늙었다며 지은 Trail name이라는 T-rex.
'아니에요 T-rex. 시작하자마자 다리가 고장 난 나보다 훨씬 나은데요 뭘..'
속으로 읊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이놈의 달은 슬프게도 밝는구나...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