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어.. 조금만 힘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아스팔트 길 저 너머로 이 길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T-rex와 헤어지고 나서 아픈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하루를 더 걸어 도착한 곳은 Hiker`s paradise라는 Paradise cafe였다. 문을 부술 기세로 박차고 들어가 눈에 보이는 빈자리를 찾아 쓰러지듯 앉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정신이 좀 들기 시작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카페 안은 늦은 아침을 해결하기 위한 여행객들과 땀에 찌들어 냄새를 풀풀 풍기는 하이커들로 북적였다.
케이트와 그녀의 친구인 케이틀린도 곧 들어왔다. 이미 카페 안은 만석인지라 4인 테이블을 혼자 용감히 점령하고 있는 나에게 합석을 요청했다. 이 카페는 pct hiker들 사이에서도 햄버거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내심 기대했으나,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점심메뉴는 오픈이 되지 않아 오믈렛으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가운 IPA를 한 모금 아니, 두어 병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실망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주문을 했다.
이곳에서부터 다음 목적지인 Idyllwild 까지는 이전에 난 산불 때문에 길이 통제되어 우회를 하던지 아니면 히치하이킹을 통해 바로 Idyllwild로 가야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상태로는 당연히 Idyllwild로 히치하이킹을 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와 트레일 정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다른 하이커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제임스와 베스, 지난밤 함께 야영을 한 커플인데 제임스는 몇 년 전 용인에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둘 다 캐나다 출신으로 이번 여행을 끝내면 동남아시아 쪽으로 떠나 그곳에서 터를 잡고 다시 영어를 가리킬 계획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머리가 벗겨져서 그렇지 제임스는 아직 30대 초반이고 베스는 20대라고 했다.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국애들 때문에 앞으로 나이는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창문 건너 야외테이블에 T-rex가 있었다. 맞은편엔 웬 할머니가 앉아계셨는데 상황을 보니 부인인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나누다 이들도 식사 후에 Idyllwild로 갈 거라는 말에 나도 합석을 하기로.. 이게 웬 횡재! T-rex가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배낭을 챙겨 이들을 따라나섰다.
Thanks T-rex!!
내가 다리가 안 좋다는 걸 알고는 친절히 가려고 하는 숙소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빨리 나으라는 말과 함께 떠나는 이들을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한번 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들어갔다.
하룻밤에 84 달러 하는 캐빈을 하나 빌려서 짐을 풀고,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땀과 먼지에 찌든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부어있는 발목에 냉수마찰을 좀 해봤지만, 크게 효과가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다리는 불편했지만, 샤워 덕분인지 기분은 상쾌했다.
편한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우리나라로 치면 산골마을 정도 되는 이 곳은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Mt. San jacinto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로 아기자기한 카페와 아트갤러리, 레스토랑, 기념품점 등 하이킹이나 암벽 등반, 낚시 등으로 인기가 있는 휴양지이다.
캐빈 좌측에 위치한 레스토랑 야외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밴드의 경쾌한 컨츄리 송은 마치 내가 장거리 하이커가 아닌 이곳에 휴양하러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듯 마을을 거닐다 장비점을 발견하곤 사지도 않을 장비들을 이것저것 만져보다 결국은 안 사도 되는 티타늄 스푼을 하나 손에 쥐고 흐뭇한 표정으로 나왔다.
배가 슬슬 고파져 마트에 먹을거리를 사러 가는 길에 캐빈 근처에서 제임스와 베스를 만났다. 이 커플도 내가 묵고 있는 캐빈 맞은편 캐빈에서 오늘 지낼 거라는.. 저녁에 여러 하이커들과 자기네 캐빈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기로 했다면서 나 보고도 오라고 한다. 오케이.
여정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단백질 섭취를 못한 터라 두툼한 쇠고기와 샐러드, 와인과 맥주가 오늘의 메인 메뉴.. 아침으로 오믈렛을 먹고 점심을 건너뛴 터라 배가 무척 고팠다. 아직 5시도 안된 시간이었지만 이른 저녁을 먹고 제임스네에서 맥주를 한잔 더 하기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다 찾아간 제임스네 캐빈에는 대여섯의 하이커들이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맥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고요하게 따스한 벽난로 안의 불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중에 '프레츨'이란 트레일 네임의 하이커가, '프레츨'과는 이후에도 트레일 안에서 여러 번 동행했다, 내 발목이 부어오른걸 보고는 얼음찜질이 필요하다며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으로 얼음팩을 만들어주었다. 뜻밖의 선의에 미쳐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그저 부어오른 발목에 얼음팩을 대고는 맥주만 마셨는데, 자기도 이전에 AT(Appalachian Trail 애팔래치아 트레일)를 종주할 때 똑같은 부위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얼음찜질로 효과를 봤다고 자신했다. 고맙다는 의미로 맥주를 들어 보이곤 멋쩍은 미소와 함께 한잔 쭈욱 들이켰다.
베스는 캠프파이어는 무조건 마쉬멜로우가 필요하다며 언제 꺼냈는지 두툼한 마쉬멜로우를 긴 꼬챙이에 꽂아 불 앞에 자리를 잡고는 낚시를 하듯 마쉬멜로우를 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제임스는 아직 시작한 지 며칠 안되었지만 그동안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이어 마치 이 순간만 기다렸던 사람들 마냥 너도 나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꽃 만큼이나 붉게 물든 얼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었고, 커지는 웃음소리 만큼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얼음찜질에도 불구하고 발이 나을 기미가 없어 오늘 출발해야 하나 하루 더 쉬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주영 선배님께서 전화를 주시곤 상기 형님과 함께 여기로 저녁에 오신다고 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루 더 묵기로 하고 얼른 카운터로 가 연장이 가능한지 물었고, 다행히 예약이 없었는지 체크아웃 시간을 하루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주영 선배님이 계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그래도 차를 타고 두어 시간을 와야 하는 이곳까지, 나를 위해 와 주신다고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몸보신을 위한 갈비와 소주도 챙겨 오신다고 하시니..
처음으로 맞이하는 제로데이(운행을 하지 않는 예비일)라 뭘 해야 할지 몰라 빈둥거리기만 했다. 잠도 더 자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두어 번 하고.. 침대에 누워 얼음찜질도 하고, 베란다에 걸터앉아 광합성을 하면서 지나가는 하이커들에게 인사도 하고..
무료한 듯 무료하지 않은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제임스와 베스가 짐을 꾸려나왔다. 오늘 트레일로 돌아가는 거냐 물으니 내일 출발할 건데 예약자 때문에 방을 더 잡을 수 없어 숙소를 옮길 거라 한다. 아무래도 하루 더 쉴지 말지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난 그들에게 저녁에 한국 친구(?)가,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던, 코리안 BBQ와 소주를 가져올 거니 꼭 들리라고 하자 대뜸 김치도 있냐고 되물었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부터 김치의 매력에 푹 빠졌다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꼭 올 거란 말을 남기곤 베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난밤 제임스와 베스가 묵었던 캐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는데, 맙소사, 케이트와 케이틀린이었다. 마침 나를 발견했는지 케이트가 '쿨~케이~'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러 뛰어왔다. 이제 막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며 발 때문에 하루 더 쉬고 간다는 날 걱정해주기까지.. 케이트에게도 저녁 초대를 하고는 다시 내일을 위한 얼음찜질을 하러 침대로 돌아갔다.
아직 해가 있어 어둡지 않은 저녁 무렵, 주영 선배님과 상기형 그리고 상기형 형수님까지 함께 캐빈에 도착했다. 나 뿐 아니라 4명의 굶주린 하이커들이 기다리는 코리안 BBQ, 김치와 함께,.. 나는 반가움과 고마움에 거듭 인사를 드리며, 그간의 스토리를 지난밤의 제임스처럼 구구절절 선배님들께 한편의 대 서사시 마냥 늘어놓기 시작했다.
김치만큼이나 화끈한 저녁 타임이 지나고, 내 발 상태를 본 선배님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상기 형님이 만약 발에 이상이 있으면 욕심내지 말고 Mt. San jacinto를 지나서 만나는 10번 프리웨이에서 연락을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곧 현실이 되어 Mt. San jacinto의 내리막길에 좌절한 나는 10번 프리웨이에 도착하자마자 상기 형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Idyllwild를 떠나 Humber park에서 다시 시작되는 Trail은 산을 넘어야 하는 길이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이어졌는데, 내리막에서 체중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게 발목에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Mt. San jacinto를 하루에 다 넘지 못하고, 내리막 중간에서 하루를 보내고 10번 프리웨이로 향하던 그 길이.. 지금까지의 여정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바람이 엄청 강하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는데, 그 바람을 뚫고 다리를 절면서 만나기로 약속한 10번 프리웨이의 굴다리로 가는 길에 적어도 열댓 번은 넘게 쉬었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보급지인 Ziggy & bear에 도착해 쉴 수도 있었지만, 내 오른쪽 발목은 치료가 필요했다.
겨우 도착한 굴다리에서 상기 형님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게 정말 나를 시험하는 것이고 누구나 한 번쯤 이 길에서 겪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절대 이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적어도 나는 아닐 것이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생각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려 애썼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Sin prisa, pero sin pausa.
저 앞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상기 형님이었다. 살았다 이제....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