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널 자꾸 얽매이게 만드는 거야?
치료를 받기 위해 잠깐 트레일에서 벗어나 상기형 댁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치료를 받으면서도 한시바삐 트레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주영 선배님과 상기형이 결국은 쓴소리를 하셨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 건지 사실 나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벗어나 순수하게 나 자신과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시작한 이 여정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를 자꾸 얻으려고만 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이틀밖에 안 지났고 치료도 한의원에서 침 한번 맞은 거밖에 없는데.. 낫지도 않은 다리로 자꾸 트레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잘 못 된 게 분명하다.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면 막막한 현실에 부딪혀 힘겨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아니면 PCT 종주를 통해 뭔가 하나라도 얻어내고 싶은 갈망 때문인 건지,.. 햇살 눈부신 어느 한적한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모닝커피와 달콤한 블루베리 치즈크림을 얹은 베이글로 맞이하는 이 한가로운 브런치 타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한순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내려놓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다 내려놓고 비울 거 다 비워낸 순하디 맑은 도화지처럼 되어 그 위에 인생 2막을 그리려고 온 거 아니냐고?!'
답하지도 못할 질문들을 속으로 쏟아내면서 스스로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맞다. 그랬다. 나는 이 트레일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내가 만들고 준비해놓은 덫에 걸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미천한 경험이 불러낸 자만심이 생전 처음 접한 새로운 환경에서 몸이 미처 적응도 하기 전 최고의 컨디션을 내도록 마구 채찍질했었고, 이 여정을 통해 스스로를 높이고 주목받고 싶은 욕심에 있는 그대로를 즐기기보다 무언가를 자꾸 찾아내려 애를 썼던 거 같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이 여정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수했던 그때로..
상기형 댁으로 돌아오자마자 차고 있던 GPS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동안 하루하루 걸은 거리를 확인하고 기록하며 다리가 아파 절뚝이면서도 꾸역꾸역 20mi을 채우려고 애를 쓰면서 시계를 계속 체크했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배낭 안의 짐도 싹 꺼내서 다시 정리했다. 욕심 혹은 이전의 경험 때문에 챙겼던 장비, 옷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양말 세 켤레, 속옷 두세 벌, 반바지, 긴바지, 반팔, 긴팔 셔츠.. 옷만 하더라도 입지도 않는 여분의 옷이 너무 많았다. 이전에 늘 그렇게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바 별로 여벌이 필요치 않아서 양말 한 켤레, 속옷 하나, 긴바지, 긴팔만 남기고 다 끄집어냈다.
조금씩 짐을 내려놓기 시작하자, 복잡했던 머릿속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트레일로 복귀하려던 것도 좀 더 쉬고 5일 후에 한번 더 오라는 한의사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 푹 쉬고 다 나아서 출발하기로.. 생각이 많으면 인생이 고달프다는 타짜 영화 속의 아귀의 대사대로, 생각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홀가분해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 6개월이 걸릴 여정 속에서 고작 일주일 쉬는 게 뭐가 대수야?
꿀처럼 달콤한 휴식 속에서 내 다리도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그래도 긴장을 유지하고 싶어 상기형과 함께 클라이밍 짐에 가서 몸도 풀고, 이볼브 본사에서 근무하시는 정재학 선배님을 만나 인사도 드리고 선배님 댁 근처에 있는 말리부에 가서 클라이밍 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아직 다리가 불편해서 직접 하지는 못하고 선배님들 하시는 걸 구경만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번 맞아 본 적 없던 침을 미국에서 두 번씩이나 맞을 줄 누가 알았겠나? 다행히 침 맞은 게 효과가 있어 발목의 붓기는 다 가라앉았고, 통증도 거의 못 느낄 정도로 거의 회복이 되었다.
나에겐 천사와도 같은 주영 선배님과 상기형 덕분에 몸과 마음이 모두 완치된 듯했다.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고, 덕분에 다시 트레일로 돌아가게 되면 그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내 안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거 같았다.
가난한 하이커라 마지막 밤을 한국식 치킨과 맥주로 감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주치는 잔에서 나는 소리가 더더욱 크고 진하게 느껴졌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情. 난 내가 가진 그릇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다음날, 주영 선배님께서 배웅을 해주신다 해서 상기형과 형수님께 감사편지를 남기고 얼른 짐을 챙겨 나섰다. 오늘 다시 트레일로 간다는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날씨도 조금 흐려 많이 덥지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너무 강해 오히려 이런 흐린 날씨가 하이킹하기엔 더 좋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하나씩 들고 트레일 중단 지점인 Ziggy & Bear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약 한 시간 좀 더 걸려 도착했다. 만약 다리만 안 아팠으면 이곳 트레일 에인절 하우스에 머물며 다른 하이커들과 섞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텐데,.. 아쉽긴 했지만 몸이 더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Ziggy & bear로 보급품을 보내 놓은 게 있어 찾기 위해 잠깐 들렀다. 많은 하이커들이 이른 시간이었지만 빨래도 하고 뒷마당에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hi' 'how`s going~'
마주치는 하이커들과 인사를 나누며 안내표시가 걸린 곳에서 보급품을 찾았다. 8일 치 식량이 들어있는 보급품 박스에서 건조 식량인 '마운틴하우스'와 육포는 주영 선배님 편으로 다시 보내기로 하고, 준비해온 행동식으로 대체했다. 아침 점심은 행동식으로 때우고 저녁만 조리해 먹기로,.. 학습의 효과였다.
선배님과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또 몸이 안 좋아지면 바로 연락하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서로가 안보이게 될 때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올 때와는 다르게 다시 태양이 다시 돌아와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마냥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려쬐기 시작했다. 바람이 강한 지역이다 보니 저 능선 위로는 풍력발전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고, 시원한 바람 덕분에 뜨거운 태양도 견딜만했다. 콧 속으로 들이키는 흙내음이 기분을 좋게 했다. 일주일이란 시간을 바깥세상에 머물면서 문명을 만끽했는데, 금방 젖어드는 셔츠와 흙냄새를 맡으니 야생으로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오늘은 갈 수 있는 곳까지만 무리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첫날부터 무리해서 좋을게 없으니까,.. Data book을 확인해보니 큰 강도 있고 15 ~16 mi 지점에 숙영 할 수 있는 곳에 물도 있어 운행에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바람이 좀 강하긴 했지만 길이 너무 좋아 맞바람에 맞서기도 하고 등 떠밀리기도 하면서 즐겁게 길을 걸었다. 점심은 대충 길 가에 앉아 에너지바와 견과류로 때우고 계속 걸었다. 지도에는 큰 강이 있다고 하는데 가뭄이 심해 다 말라버렸는지 앙상한 물줄기만 흐르고 있는 형태만 남은 강이 하나 나왔다. 가뭄이 아니었음 제법 큰 강이었을 거 같은데 살이 빠져 그런지 영 볼품이 없었다. 마실물은 넉넉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가는데 왼쪽으로 언덕이 내어준 그늘 아래 매트를 깔고 쉬고 있는 하이커들도 여럿 보였다. PCT로 돌아오긴 했구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계속 길을 걸었다.
다리에 최대한 무리를 안 주고 걸으려 하는데 아직도 완전히 나은 게 아닌 듯하다. 발목의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무릎 쪽의 통증은 조금 느낄 수가 있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조금씩 조심스럽게 걷고 걸어 오늘 숙영 할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숙영지는 훌륭했다. 나 말고도 세네 명의 하이커들이 더 있었지만 서로 방해되지 않을 만큼 텐트 사이의 거리는 충분했다. 텐트를 치고 텐트 사이트 옆에 흐르는 물줄기에 반다나를 적셔 대충 얼굴과 팔만 닦아내고는 텐트에 드러누웠다. 저녁을 안 먹었지만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신 매트를 텐트 밖으로 조금 꺼내어 머리만 내어놓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올려다보며 이런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여유와 이를 허락해 준 자연에 감사했다.
그동안 같은 길 위에 있었지만 허영을 쫓으며 놓쳤던 것들,..
순수한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나 자신.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하나 둘 씩 느낄 수 있는 게 눈에도 보였다.
저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처럼...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