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에뷔테른의 초상, 191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방대한 소장품 속에서도 갤러리 908은 유난히 정적이다. 파리 오르세처럼 인파가 북적이거나, 루브르처럼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메트 특유의 중후한 공간은 그림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절묘하게 가라앉힌다. 그곳에서〈잔 에뷔테른의 초상〉을 마주했을 때, 주변의 발소리가 잦아들고 공기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얀 셰미즈 차림의 여인이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기울이고,
손끝으로 뺨을 받친 모습은 관객에게 묘한 멈춤을 강요한다.
표정은 담담해 보이지만, 오래 응시할수록 그 안에서 애정, 피로, 침묵, 그리고 불안이 교차한다.
마치 여행 중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눈길처럼,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이 초상은 1919년에 제작되었는데, 이는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모델은 그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잔 에뷔테른(1898–1920). 화가와 함께 몽파르나스의 좁은 방에서 살며, 그와 딸을 낳고 또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딜리아니가 1920년 초 병과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나자, 잔은 이틀 뒤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사가 아니라, 당대 예술가들이 가난과 병, 사회적 불안 속에서 어떻게 생존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준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20여 점의 잔 초상들은 단순히 한 여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들의 불운한 사랑과 짧은 동행 전체를 압축하는 기록물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사랑의 초상인 동시에 운명의 기록으로 읽힌다.
모딜리아니의 초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늘 얼굴이다. 길게 늘어진 타원형 얼굴, 매끄럽게 정리된 이목구비, 그리고 무언가 비워낸 듯한 눈. 이 작품에서도 잔의 눈동자는 채워지지 않은 듯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공백은 무심함이 아니라 깊은 침묵이다. 관객은 이 비어 있는 눈을 해석하려 애쓰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 눈에서 고독을 읽고, 누군가는 사랑의 흔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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