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by 박정현 -
지금의 나를 정의하는 말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이혼남’ / ‘MBC 라디오 스타 PD’ / ‘인터넷 신문사 칼럼니스트’ / '두 아들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빠’, ‘이혼 후 조울증이 심해져서 친구들과 자꾸 멀어지는 까칠남’ / ‘실직자’ / ‘실직 후 주식시장에서 요행을 바라는 데이 트레이더’/ ‘올해의 당근 마켓 인(人)’ / ‘매일 밤 화분 아흔 개와 잠이 드는 애수인(愛樹人)’...
이리 보면 전부 맞기도 하고, 저리 보면 일부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확실한 건 위에 나열한 정의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2020년, 작년 2월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아직도 떠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딱 작년 이 즈음이었다.
25년 재직 기념으로 회사에서 주는 한 달 청원 휴가를 가고 싶으니, 결재를 해달라고 여러 차례 회사에 요청했었다. 작년 이맘때는 아직 코로나라는 괴물이 전 세계를 짓누르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로코에 가려고 했었다. 모로코의 마라케시 - 이곳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이슬람 전통시장이 있다-에서 몇몇 고서적을 구입하고 싶었다.
MBC 라디오에서 25년을 PD로 근무했지만 아직 정년이 10년은 더 남아있으니, 별 탈 없이 정년 35년을 채우면 터키의 이스탄불이나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가서 고서적상을 하려는 오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 이슬람 신자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성당에는 가지 않지만 로마 교황청에서 믿는 신에게 매일 밤과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성경보다 이슬람의 고서적에 늘 더 관심이 있었다. 10여 년도 훨씬 전인 1998년에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과, 인도의 전역을 6개월가량 여행했을 때, 이슬람 문명이 들려주는 고고한 역사와 신비로운 문화의 이야기에 충분히 매료될 만큼 보고 들었기 때문일 거다.
특히 '이슬람 회화(繪畵)'는 나에게 큰 감동을 준 분야이기도 했는데 이슬람은 종교의 교리상 성물이나 성상(聖像)을 제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회화적인 역량을 이슬람 서적에 삽화를 그리는데 매진했다. 내가 가족과 함께 살던 여의도 집에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을 함락하려는 이슬람 군대들의 모습을 그린 이슬람 회화의 프린트가 걸려 있었는데, 여의도 우리 집에 걸려 있던 수십 점의 명화 프린트 중에서도 나는 그 그림에 가장 매혹됐었다.
이슬람 삽화 중 하나 : <Zahhak is Told His Fate, 작가: 술탄 무함마드, 제작연도: 1524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세 가톨릭 미술과는 다른 안료의 화려함과 , 선명한 색의 대비, 그리고 인물들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배경을 장식하는 문양들과, 아라베스크의 세밀함, 유려한 곡선 같은 요소들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후에 좀 더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슬람은 신의 모습을 형상화할 수 없는 규율 때문에, 인물 표현 등에서는 극도의 절제를 보이지만, 문자/식물/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울려서 무한 곡선이 융합되어가는 환상적인 장식에서는,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는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에 머물 때는 라자스탄주(인도 대륙 역삼각형의 왼쪽 꼭짓점에 있는 주)에 오랜 기간 머물렀는데, 라자스탄을 오랜 기간 지배했던 라지푸트 왕국의 예술에는, 음악의 선율을 시각적 정경(情景)을 빌려 표현하는 ’ 라가말라 ‘라는 미술이 있다. 멜로디를 라가(남성)와 라기니(여성)로 의인화해서 표현하고, 다시 여러 개의 유형으로 세분화해서 회화의 법칙을 만들었다.(라가말라와 당시에(16세기~17세기 중반) 라자스탄에서 유행했던 미술을 통칭해서, '라지푸트 미술 (Rājpūt painting)'이라고 부른다)
<라지푸트 미술 양식 중 하나인 라가말라 : 제작연도, 1580~1590년 / 종이에 유화 / 크기 18 x 19.3 cm / 인도 국립 박물관 소장 >
본래 아랍인에게는 성숙한 회화 미술은 부족했기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비잔틴, 헬레니즘, 인도의 힌두 미술 등 여타 문화를 흡수하면서 지금의 이슬람 회화 양식을 갖추었다. 이런 이유로 16세기 초부터 꽃을 피웠던 인도 라자스탄의 라가말라 (무형의 음계를 의인화해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회화 양식이, 이슬람의 아라베스크(신에 대한 경배를 무한 반복되는 환상적인 문양으로 표현하는 기법)로 발전되지 않았을까 늘 궁금했었다.
얘기가 너무 옆으로 샜는데, 이런 배경에서 작년 1월에 모로코에 가려고 했으나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 계속 무산되다가 2020년 2월을 맞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코로나로 인해 출국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갑자기 생긴 회사에서의 이런저런 문제들과 이슬람 미술을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스트레스로 아내와 크게 다투게 되었다.
<이슬람 아라베스크 장식은 카펫과 모스크 타일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사진은 서울 소격동 바라캇 미술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이슬람 카펫. >
그로 인해 2월 말 무작정 제주로 떠나서 혼자 머물렀는데, 제주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더 이상 서울로 올라가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하고 회사에도 사직서를 내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작년이 '닭띠에게는 삼재'였다는데 나는 300재 정도의 1년을 보낸 듯했다.
가족과 회사의 동료들을 떠나보냈고, 고양이 키키와도 이별을 했고,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하는 걸 매우 좋아했던 라디오 PD직도 떠나보냈고, 자주 우울해하다가 화를 내고를 반복하며 오랜 벗들도 떠나보냈다. 가장 소중히 여기던 이 모든 걸 떠나보내고 나니, 나 역시 제주의 푸른 바다로 떠나보내려고 했으나 서귀포의 경찰과 소방관 아저씨들만 출동시키고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를 규정해볼까 ?
하지만 여전히 2020년 1월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 사이엔 괴리가 너무 커서 무슨 규정이란 게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거 같았다.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아버님의 전화를 받았다.
’ 주말이 네 어머니 팔순인데 한번 오지 않을래? 식사라도 같이 해야지...‘
제주와 순천에서 1년을 보내다가 작년 12월부터 서울 평창동 월세집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대치동 부모님 집을 찾아가지 않았었다. 1년 전의 나로 돌아가기 싫었던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님 팔순에는 빠질 수 없을 거 같았다.
---------([오랜만에] (2)에서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