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는 모진 그대를 배울 수 있게

-음악이 흐르는 풍경 , [오랜만에] by 박정현-

by 이안

2011년 봄 MBC FM4U에서 [홍은희의 음악동네]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다. 홍은희 씨는 '국민남편 유준상'의 아내이자, <아시아나 항공> TV 광고의 승무원 모델을 했을 만큼 미녀 탤런트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상당히 폭넓게 음악을 듣고 국내 가요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방송인 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와 6개월 동안 짧게 [음악동네]를 연출했던 기간은 스태프들 모두가 서로 잘 맞았기 때문에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었다. FM 스튜디오에서 음악이 나갈 때면 PD와 둘이 있는 시간에 그녀는, 본인이 ‘지금 나오는 이 음악과 뮤지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사춘기 학생처럼 조곤 조곤 얘기하곤 했는데,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 의 콘서트장을 찾아온 열성 소녀팬 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곤 했다.


라디오 PD 특히 FM PD에게 음악을 좋아하는 DJ와 함께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다는 건, 라디오 PD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이다. 방송국의 라디오 시스템상 그리 넓지 않은 생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PD와 DJ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은데, 공간과 시간을 풍성하게 채워가는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서 서로 소통하고, 그 음악에 관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라디오 PD를 지망하고 방송국에 입사 원서를 낸 누구나가 꾸었던 꿈일 테니까.


그런 와중에 은희 DJ가 김현철 씨를 게스트로 모셔줄 수 없냐고 물었고, 평소 친분이 있던 현철 씨를 초대해서 청취자가 뽑은 BEST 앨범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매주 가졌었다. 어느 날 청취자가 뽑은 BEST 앨범 중에 [박정현 1집]이 있었는데, 이 앨범 속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셋은 가수 박정현에 관한 추억을 한참 동안 사담으로 나눴다. 김현철은 박정현에 대한 기억으로,


어느 날 음반사 사장이 들려줄 게 있다면서 사무실로 나를 부르더니 음악을 틀어주는 거예요. 처음엔 아직 앨범도 발표하지도 않은 가수였으니까, 박정현이 누구인지 당연히 몰랐었죠. 그런데 앨범으로 발표하기 전인 그녀의 데모 테이프 노래를 듣고, 정말, ’아!~~~~~~~~~~~~~~~~~~~~~~~~~~~~~~~~~~~~~~~~~~’ 하고, 30~40초 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그만큼 그녀의 가창력은 놀라웠어요. 보컬로서의 기교뿐만 아니라 감정 전달력이 매우 뛰어난 가수였어요.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 날이 박정현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죠

라고 목소리로 처음 알게 된 박정현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윤종신이 프로듀싱을 맡아서 1988년에 발표한 박정현의 데뷔 앨범 [piece]가 처음 라디오 전파를 탔을 때 국내 음악팬들도 김현철이 느꼈던 감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날 스튜디오에 함께 앉아 있던 은희 DJ와 중견 가수 김현철 그리고 나는, 박정현 1집 속 [오랜만에]를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면서 행복해했던 기억도 생각난다. 김현철은 박정현 1집 속에서 특히 윤종신이 작사한 [오랜만에]를 좋아했는데, R&B 버전보다 어쿠스틱 버전을 더 좋아한다고도 했다. 이 노래는 멜로디도 그렇지만 윤종신이 썼던 가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우연히 그대 내 소식 듣고 / 너무 반가웠다고요

하지만 내게 그대 소식은 / 며칠 밤을 헤매게 하죠

나 이제 그대에게는 /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요 추억인가요 / 그대에겐 너무 쉬운걸

나 지금 그댈 보아요 / 마냥 웃고만 있는 모습을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는 / 모진 그대를 배울 수 있게


- 가수 박정현의 [오랜만에] 가사 중에서 (작사 윤종신) -


<박정현 1집 [piece] 가사집의 일부 >


과거에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을 만난 그녀는, 그를 보면 아직도 견딜 수 없게 마음이 아프다. 옛사랑의 그리움은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게 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으로, 그는 그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그저 반가웠다고...


가슴이 무너질 거 같은 그녀는 혼잣말을 한다.

나 이제 그대에게는 /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요? 추억인가요?


(어쩌면 그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아픔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마냥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재회에 울지 않기 위해서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노래는 과거의 연인중 한 사람의 심정만을 말하고 있으니 상대남의 마음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연인과 이별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겪어 봤음직한 상황을 그림을 그리듯 써 내려간 가사에 가수 김현철도, 홍은희 DJ도, 사연을 보냈던 청취자도, 선곡을 했던 라디오 PD인 필자까지 모두가 가슴 아프게 공감할 수 있는 노래였다.


피터팬 PD의 음악 칼럼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R&B 가요의 명곡 박정현의 [오랜만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앞서 1부에서 언급했던 필자의 어머님의 팔순 생일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내 방 안에서 꼭 듣고 싶은 곡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어머니의 팔순잔치를 위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와 줄 수 있겠느냐 물었지만 승낙을 얻지는 못했다. 두 아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한 이후 나에 대해서 모든 감정이 식어버린 두 아들은 나와 마주치기를 원치 않았고, 그렇다면 내가 가지 않을 테니 할머니만 뵙고 가면 어떻겠냐 제안했지만 역시 승낙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만 팔순 생일상을 드시게 할 수도 없었기에,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본가의 부모님을 찾아뵀다. 내가 이혼을 하고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늘 걱정하셨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는 안타까워하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기억과 사랑은 다르게 쓰이기 때문이다. 두 손자들의 어린 시절 수 년을 돌봐 주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과, 조부모님 당신들의 기억은 다르게 쓰인다. 20여 년을 매일매일 사랑한다 말하면 한 집에서 살아온 남편과 아내의 추억 역시 다르게 쓰인다.

덩그러니 비어있는 아들의 방을 볼 때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제법 잘해서 늘 부모님을 기쁘게 했던 아들의 방이라면 애지중지 여기시는 어머니의 기억과, 시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눈물을 훔쳤던 방이었다고 떠올리는 며느리의 기억 역시 다르게 쓰인다.


누군가에게는 며칠 밤을 지새우게 하는 영원한 사랑의 아픔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스치듯 지나가는 짧은 기억으로 머문다. 평생 잊을 수 없어 눈물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그 사람과의 소중한 추억도, 그 사람에게는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흔한 기억이다.

모두의 가슴속에 쓰였던 던 추억과 사랑은, 다르게 기억되고 다르게 읽힌다.


< 추억의 앨범 속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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