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에 발매된 [동물원]의 5-1집에는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라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던 포크그룹 [동물원]의 노래 중, 과거의 추억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로 소중하게 보듬어 안는 노래들은 거의 김창기가 썼고, 이 노래 역시 김창기의 작품이다.
동물원 앨범에 수록됐던 <혜화동>,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거리에서>, <널 사랑하겠어>, <변해가네> 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비롯해서, 김광석이 솔로로 데뷔하고 부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기다려줘> 임지훈의 애절한 포크 발라드 <사랑의 썰물>, 얼마 전 양희은이 불러 큰 공감을 얻었던 <엄마가 딸에게>등의 노래들이 동물원의 멤버였던 김창기의 작품이다. 이런 노래들을 듣다 보면 김창기는 지금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지만, 의사가 되기 전에 이미 노래로 사랑에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왔다고 생각한다.
서두에서 그의 노래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소중했던 추억을 만화, 책, 노래,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놓고 있다.
"... 어렸을 때는 우주소년 아톰과 마루치, 아라치를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성문 종합 영어보다 비틀스 그리고 산울림의 노래를 좋아했고, 대학 때 만났던 우리들의 여자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됐다고 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라디오와 함께 살았었지 성문 종합 영어보다 비틀스가 좋았지 생일 선물로 받았던 기타 산울림의 노래들을 들으며 우리도 언젠간 그렇게 노래하고 싶었지
- 동물원의 <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가사 중에서 -
<1993년 3월에 발매된 [동물원 5-1집]의 앞면>
필자는 이 노래를 여의도 MBC의 어느 노래방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MBC 라디오 PD로 입사를 하고 얼마 안 되어,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주철환 PD(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MBC 예능 [일밤]의 연출)가 후배들을 여럿 모아서 술을 사줬는데, 2차로 노래방에 가서 주 선배는 마이크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가사가 있어서, 이후 회사 음반실에서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를 이 노래의 마니아로 만든 가사는 이 부분이었다.
(대학시절) 우리들이 꿈꿨었던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들은
이젠 유행이 지난 이야기라고 해
이젠 모두 다 우리의 추억 속에서
빛을 잃고 있어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 아직 너무도 많아
김창기는 연세대 의대 82학번이다. 80년대 초반 대학에 다녔던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은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의 암흑 같은 세상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뜨거운 가슴속에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 있었다. 그들은 서클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에 관한 책을 읽었고, 토론을 했고, 진지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대학시절 공부했던 사상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은 유행이 지난 이야기처럼 퇴색되어 있었다.
이런 꿈은 폭압적인 독재정권 시절을 겪어야 했던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청춘들이 거쳤던 통과의례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주철환 PD가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를 노래방에서 불렀던 1995년의 설 즈음에, 필자 역시 대학시절 꿈꿨던 새로운 세상과, '유행이 지난 이야기' 속에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창기의 가사에 더욱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설이었다. 1995년의 새해로부터 25년이 더 지난 설이었다.
떡국을 먹으러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우연히 책장 한 귀퉁이에 먼지 쌓인 채 꽂혀있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아침)이라는 책을 꺼내보았다. 책 값은 3,500원이었고, 마치 타자기를 친듯한 촌스러운 작은 글씨체가 가득한 책이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마르크스가 죽은 다음 해인 1884년에 마르크스의 학문적 업적을 완수하려는 뜻에서 엥겔스가 쓴 책. 이 책은 루이스 모건이 쓴, [고대사회] (Ancient Society)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석을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가족 경제학에 대한 최초의 저술이기도하다.
마르크시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이 책은, 1980년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다. <자본론>, <공산당 선언> 같은 마르크스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들도 있었지만,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인류가 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인류의 고대 역사를 고찰하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김연수, 한강, 장강명, 알랭 드 보통, 기욤 뮈소 등의 책을 읽는다면, 당시엔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 그리고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을 공부하고 꾸었던 시기였다.
2021년 신축년의 새해 아침에, 1980년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원의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를 다시 듣고,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다시 펼쳐보며, 유행이 지난 노래와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지난 1년,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인해 온 세상이 일지정지!, 멈췄어야 했기 때문에 일단 묻어놓고 지나갔지만 한국사회에는 1980년대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리고 코로나 19의 종말이 오면, 온 세상에 풀렸던 유동성은 빈부의 격차를 더 크게 만들 것이다.
새해,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유행이 지난 사상과 노래를 다시 반복 재생해서 듣지 않아도 될 만큼의 준비를 해가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코로나 19가 비틀어 놓은 운동장에서 우리 사회는 다시 휘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