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와 AI 스피커

-음악이 흐르는 풍경, Desperado / Eagles-

by 이안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 들어서 세 번째 봄비가 내린다.

지난 3월 1일에도 서울 다른 지역에는 비가 내렸다지만 필자가 살고 있는 종로구 평창동의 북한산 아래에서는, 밤이 되면서 함박눈이 펑펑 내렸기 때문에 3월의 대설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방송국에서 라디오 PD로 일하던 시절,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피터팬 음악 PD는 주로 마이너 음계의 슬픈 가요 발라드를 즐겨 들었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선곡하고 싶은 곡이 무척이나 많았기에 행복했었다.


특히 <김이나의 밤 편지>, <홍은희의 음악동네>처럼 분위기 있는 음악을 주로 선곡했던 프로그램을 연출할 때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오늘처럼 봄비가 온다면, 첫곡으로는 아이유의 [Rain drop]를 선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곡으로는 비에 관한 노래 중에서 세련된 리듬으로 편곡한 투개월의 [여우야]를 틀었을 거다.


그리고 이런저런 신청곡을 틀다가 프로그래 중간쯤에, 윤하의 [빗소리]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잡고, 프로그램 말미에 박효신의 [나처럼] 혹은 이적의 [Rain] 같은 애절한 남성 보컬의 노래로 대미를 장식하는 선곡을 할 생각을 하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멜론]이나 [네이버 바이브] 등의 AI 선곡 시스템과 달리, 실시간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는 청취자들의 감성과 그날의 분위기 등을 반영하면서 선곡을 할 수 있다. 물론 AI 스피커에게 “오늘 분위기에 맞는 노래 틀어줘~” 혹은 “비에 관한 노래 틀어줘~”라고 명령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AI 스피커가 인간 음악 PD들의 선곡 능력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듯하다.


라디오를 통해서 들려오는 음악에는, DJ의 공감능력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멘트와 숨결, 그리고 청취자들의 취향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FM PD들의 감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처럼 빠르니까, AI 선곡 시스템에 대한 라디오 음악방송의 비교우위도, 몇 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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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네, 오래된 친구, 오래된 책처럼 우리 곁을 지켜주었던 오래된 라디오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라디오 DJ도, 라디오 PD도 혹은 라디오라는 매체 자체도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수년 안에 라디오의 FM 음악 방송이 AI 음악 선곡 시스템에 밀려 사라질 거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온다면, 25년 동안 MBC에서 음악 PD로 일했던 필자는 참으로 슬플 것 같다. 단순히 라디오라는 매체가 사라지고, 라디오 PD라는 직업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수없이 반복 재생하면서 들었던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온다면, '어딘가에서 이 음악을 동시간에 듣고 있는 청취자들도, 이 음악을 틀어줬던 라디오 프로그램 DJ도, 방송국 PD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겠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믿음에 기대어 슬픈 청춘의 아픈 가슴에 난 사랑의 상처를 어느 정도 보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슈퍼 컴퓨터의 AI 선곡 시스템 '카카오 미니' 혹은 네이버의 ‘클로바’가, '사랑에 통곡했던 청춘의 절절한 아픔'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할까?라는 의문에 생각이 미치면, '공감'이라는 기댈 언덕을 잃어버린 것처럼 금세 허망한 외로움을 어찌할 수 없게 된다.


필자는 지금 윤하의 [기다리다]라는 곡을 듣고 있다. 물론 다음카카오의 AI가 스피커가 틀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 속 가사 중에서


어쩌다 그댈 사랑하게 된 거죠

어떻게 이렇게 아플 수 있죠

한번 누구도 이처럼 원한 적 없죠

그립다고 천 번쯤 말해보면 닿을까요

울어보고 떼쓰면 그댄 내 마음 알까요 - 기다리다 / 윤하


행여라도 ‘울어보고 떼쓰면 / 그댄 내 마음을 알아줄까’라고 간절히 기다리고 바랐던 마음을, MBC FM [푸른 밤]의 옥상달빛, [FM 데이트]의 전효성, 혹은 [별이 빛나는 밤에]의 김이나 별밤지기가 아니라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이름 만 번쯤 미워해볼까요

서운한 일들만 손꼽을까요

이미 사랑은 너무 커져 있는데

그댄 내가 아니니 내 맘 같을 수 없겠죠 - 기다리다 / 윤하-


노래 가사 속, ‘그댄 내가 아니니 / 내 맘 같을 수 없겠죠’처럼, ‘인공지능 AI는 사랑을 해보지 않았을 테니 / 인간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죠’라며, 공감이라는 위로를 상실해버린 쓸쓸함에 음악에 대한 감동이 사그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주에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듣고 싶은 노래는 비와 관련된 노래이다. 필자가 앞서 예로 든 노래들도 함께 나누고 싶지만, 사실 필자가 비가 오는 밤에 주로 듣는 노래는 이글스의 [Desperado]이다. 비에 관한 가사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비 오는 밤에 혼자 느끼는 고독한 심정을 닮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AI 스피커는, 이글스의 [Desperado]가 비와 연관 검색어가 아니기 때문에 선곡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몇 년 후에 인공지능이 훨씬 더 진보를 하더라도, 외롭고 고독한 밤의 정서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지능으로만 ‘이해를 한다면’, 비 오는 쓸쓸한 밤에 이 노래를 영원히 선곡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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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장 미국에서 보다 어쩌면 한국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글스의 [desperado]는 1973년에 발매된 이글스의 정규 2집에 수록되어 있었다>


오늘 내리는 비는 밤새 내릴 듯하다.

필자는 이런 비를 제주도에서의 1년간의 방황과, 순천 조계산 자락 선암사에서의 외롭던 밤과 이별을 고하던 밤에도 맞았었다. 그때는 늦은 가을이었지만, 마치 오늘 밤 내리는 봄비처럼 비가 내렸었다. 필자가 머물던 숙소 앞에 서있던 돌배나무의 가지 사이로 가을비가 흩뿌렸고, 전신주에 달린 슬픈 가로등은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물이 제 갈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땅까지 내려오는 길을 무사히 비춰주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굵어지던 빗줄기는 양철 지붕과, 마당에 펼쳐놓은 말린 감을 덮어 두었던 비닐 포대 위로 후두득 후두득 떨어졌다. 마치 재즈 드럼의 낭만적인 비트 같던 빗소리는, 그날 오후부터 천년 고찰 선암사로 향하는 자동차 지붕 위를 때리던 순천 지방 국도 선암사로의 빗소리를 연상시켰다.


국도를 따라 서있던 감나무에서 곱게 색이 물들어 가던 몇 개 남지 않은 주홍색 열매들이 빗방울에 흔들렸고, 감나무의 잎들은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새들의 찍어놓은 발자국처럼 산골마을의 마당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남도 순천에서는 국도마다 가로수로 감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눈이 따갑도록 햇살이 반짝이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꽃처럼 환한 웃음을 짓던 감들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가을비는 눈물처럼 제 몸을 하늘에서부터 떨구고 있었다. 오늘 밤 평창동의 좁고 굽어진 골목 위를 적시는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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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는 동네 서울 평창동의 골목과 가로등, 담장의 목련을 적시며 봄비가 내리고 있다>


- 피터팬 PD : ‘카카오~, 아무래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 같아 “
- AI 스피커 : ”앗, 뭐라고 하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
- 피터팬 PD : ”헤이 클로바~, 순천의 하늘과 감나무가 너무 그리워”
- AI 스피커 : “말씀하신 아티스트를 찾지 못했어요. 정확한 이름을 말해주세요”


가을비와 순천의 감나무, 그리고 봄비와 평창동의 비에 젖은 목련에 대한 슬픈 단상을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AI 스피커야!

봄비에 대한 애상을 이해 못하는 건 네 잘못만은 아닐 거야.

비 내리는 숱한 밤을 혼자 지새우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두뇌 시스템에 이상이 온 인간 피터팬의 잘못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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