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대륙 횡단기 연재를 시작하며...-
제주도는 며칠째 마른장마다. 덥고 습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반면 중부지방은 폭우로 인해 비 피해가 심각하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다. 항상 대비하고 조심해도 장마와 태풍으로 피해는 매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으니, 자연재해를 인력으로 완벽히 막기에는 지난(至難)한 길이고, 아직까지는 어려움이 많다.
기상의 변화를 완벽히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인류의 과학문명이 더 발전하면, 자연재해와의 오랜 싸움에서 결국엔 인류가 이길 수 있을까? 그러기 바라지만, 전 지구적으로 보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은 날로 가속화되고 있으니, 결론이 낙관적이지만은 않아 안타깝다.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국토 면적에서 세계 7위인 인도는 다양한 기후대가 있지만, 넓게 보면 열대 몬순 기후대에 속한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 엄청난 비가 장기간 내리는데, 인도의 서부 마드라스 에는 벵골만에서 건너오는 겨울 계절풍의 영향으로 12월~2월 사이에 1,000mm 이상의 비가 내린다.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내리는 게 아니고 몬순이 갑자기 발생하면 단기간에 엄청난 비를 퍼붓기 때문에 매해 비 피해가 막대하다.
인도 타밀나두주(州)의 주도(州都) 마드라스(지금은 첸나이라고 불림)에는 카팔레스 와라(Kapaleeswarar)라는 힌두사원을 보기 위해서 1998년 12월에 머물렀다. 이 사원은 7세기경에 지어졌다고 유추하는데 높이가 40미터에, 사원의 외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교하고, 힌두의 신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한 조각으로 빼곡히 메워져 있다. 특히 화려한 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어서 마치 만화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성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1998년 10월 말에 인도 델리에 도착해서 한 달 동안 인도의 많은 사원과 예술 작품들을 보아왔기에, 인도 힌두 문화의 예술작품이 주는 놀라움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첸나이의 사원을 보고는 정말 전 세계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챈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인도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많이 보다 보면 너무 쉽게 압도되어 버려서, 금세 질려버리는 관람객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서남아시아의 종교가 탄생시킨 이와 같은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원과 조각품들에게서 늘 큰 감동을 받았다.
물론 나 역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국보 78호 및 83호)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불교예술이 단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선의 예술'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진 반면,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예술 양식은 눈부시게 화려하면서도 마치 현장에서 꿈틀대듯이 적나라한 묘사를 강조하고 있어서 전혀 다른 아름다움에서 오는 큰 충격을 받곤 했었다.
<인도 힌두교의 부조 조각상. 적나라한 표현과 꿈틀대는 듯한 입체감이 놀랍다>
인도 대륙에는 BC1500년경 아리안족이 침입해서 본래 인도의 토착민인 드라비다족을 남쪽으로 계속 밀어냈다. 그래서 지금은 인도 최남단의 타밀나두주(州)에만 온전한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고, 드라비다족의 독특한 문화유산도 그곳에 가서야 많이 경험해 볼 수 있는다.
원래 인도 대륙 횡단 여행을 계획하면서 첸나이에 이어서 타밀나두까지 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필자의 겨울 인도 대륙 횡단 중에는, 인도 첸나이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겨울 몬순이 갑자가 들이닥쳤다. 하루 전까지 차량이 다니던 도로에는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고 철도가 끊길 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이곳에 더 지체했다가는 첸나이를 과연 벗어날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어 첸나이 사원을 마지막으로 중부 인도를 향해서 다시 올라가야 했다.
나는 왜 서울 MBC 라디오 1994년 12월에 입사를 하고, 겨우 입사 4년 만에 해고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1년 휴직을 내고 인도로 떠났을까? 부모님께는 인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났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회사 인사부에 전화를 해서 들통이 나는 사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피터팬 PD는 한국을 떠나서 반드시 히말라야로 떠나야만 했었다.
필자에게 1997년 가을부터 98년 가을까지 1년 동안은, 과음과 통곡의 한해였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 여인이 하필 나보다 7살 연상이었고, 아들도 있는 돌싱녀였다. 하지만 나의 순애보를 포기할 수 없어서 죽도록 매달렸고, 그 대가로 죽도록 차였고, 죽도록 술을 마시고 죽을 때까지 새벽을 지새우며 통곡했었다.
그녀는 늦은 새벽에도 내 전화를 받아주었으나, 매번 쿨했고, ‘너와는 안된다, 젊고 예쁜 좋은 여자 만나라’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서 마주치면, 전혀 딴 사람처럼 나를 보고도 모른 척했었다. 그러면 나는 또 절망하면서 술병을 기울이고 통곡의 밤을 지내야 했다.
지금은 나의 나이도 오십이 넘었고, 결혼도 했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 미움받아, 제주에서 홀아비로 살다 보니, 세상에 살고 있는 20대 ~30대 아가씨들이 이토록이나 젊고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왜 20대 후반 나의 한창 나이엔, 7살이나 많은 여인에게 그토록 매달렸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아무튼 통곡의 나날이 너무 길어지자 계속 이대로 살다 간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 와중에, 지식인 흉내를 내느라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당시 크게 유행했던 출판사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명상에 관한 책, 그리고 류시화 선생이 쓴 인도 기행문 등을 읽으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인도로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었다.
인도에 가서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에 포~옥 파묻혀 살다 보면, 어리석은 사랑 따위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희로애락에 초연한, 요기(요가를 통해 높은 경지에 오른 힌두교인)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우주와 별과 자연과 소통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굳은 결심으로 회사에 사직서를 내려고 했으나, 주위 선배들로부터 일단 1년만 휴직을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고, 당시 MBC 라디오 국장은 내게,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은 히말라야에 올라 큰 깨달음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막상 용기를 못 내는데 피터팬 네 뜻이 정히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 대신 지금 보다 더 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MBC로 다시 돌아와서
좋은 PD가 되어다오’
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기에, 일단 1년 휴직계를 내고 98년 10월 인도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는,
과연 내가 사랑 따위의 ‘사소한 감정’쯤엔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큰 깨달음을 얻어서,
히말라야 산속의 얼음동굴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큰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 설렘과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다.
<인도에서 오랜 세월 명상을 한다면, 사랑 따위의 '사치스러운 감정'은 잊히게 될까?>
(* 이 글은 2020년 작년 여름에 쓰였습니다)
----------------(인도 대륙 횡단 여행기 2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