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과 연기(緣起)의 대화"
조용한 숲, 바람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스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두 인물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서양 철학의 기둥, 이마누엘 칸트.
또 다른 한 사람은 동양 사상의 등불,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이었다.
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처님, 저는 인간 이성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머릿속에 선험적 구조, 즉 시간과 공간, 인과율 같은 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계는 우리 인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말씀은, 인간의 인식이 객관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틀을 통해 경험한다는 이야기군요."
"맞습니다." 칸트가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인간은 세계를 절대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고, 오직 '현상'만을 경험할 수 있지요."
부처님은 손바닥에 가만히 부드러운 잎사귀 하나를 올려놓았다.
"칸트여, 그것은 마치 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고정되지 않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군요.
하지만 저는, 그 선험적 구조조차도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생기고 사라질 뿐이지요."
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부처님,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 인식 자체에도 본질이 없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잎사귀를 살며시 놓으며 말했다.
"눈이 있어 대상을 보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가 조건에 의해 잠시 일어날 뿐입니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무아(無我)입니다."
칸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아라… 하지만 부처님, 만약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아라면,
도덕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인간 안에 선험적 도덕법칙이 있다고 믿습니다.
'너 자신에게만 해당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만을 따라 행동하라'는 이 법칙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부처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덕 역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인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순간적이거나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연기(緣起)합니다.
내 고통은 너의 고통과 다르지 않고, 내 행복은 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깨달음이 자비심(慈悲心)을 낳습니다."
칸트는 반문했다.
"그러나 부처님, 만약 도덕이 단지 조건적이라면,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덕스럽게 행동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변함없는 도덕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세상이 변해도, 의무는 변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조용히 흘렀다.
그러다 부드럽게 물었다.
"칸트여, 누군가 고통받는 생명을 보고 자비를 베풀 때,
그것이 '의무'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존재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까?"
칸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는…"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도덕법칙을 따르는 이유가 자비심에서 나오는 것이든,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원칙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요." 부처님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법칙'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각'을 통해 스스로 연민하고 깨어나는 존재라고 봅니다.
이해를 통해 일어나는 행동은 강요가 아닌 자연입니다."
칸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부처님. 도덕의 기반이 이성과 원칙이 아니라,
연민과 자각이라면,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닫게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단호했다.
"그가 행하는 악이 결국 자신과 모두를 해치게 된다는 사실을.
무지(無知)가 악의 뿌리입니다.
벌을 주는 것보다, 깨우침을 돕는 것이 더 깊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칸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도덕을 법칙과 의무로 보았고, 부처님은 도덕을 깨어남과 연민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 " 칸트는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법칙 없는 세상은 방종으로 흐르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은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법칙은 필요합니다.
다만, 법칙은 외부로부터 강요되어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법칙은 자각 속에서 피어나야 오래갑니다.
그대가 말하는 선험적 도덕법칙이 인간 마음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아는 깊은 자각의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칸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부처님의 말은, 자신의 도덕법칙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자유로운 이성'과 '자발적 연민'이 만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럽게 허리를 숙였다.
"부처님, 오늘 저는 저의 이성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세계를 배웠습니다."
부처님 역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칸트여, 그대의 이성은 찬란합니다.
그 빛이 중생을 위한 자비와 만날 때,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느 쪽도 완전히 상대를 꺾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 깊은 곳에서, 조금씩 배우고 수긍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숲은, 여전히 조용히, 그러나 어딘가 더 따뜻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