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사월이 진다

-4월의 절망과 침묵-

by 이안

마침내 사월이 진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사람은 사랑했다가 떠난다.
남는 건, 아주 오래된 절망.


기억이라는 이름의 빈 의자 하나가 마음속에 놓여 있다.

사월이 오는 일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그녀가 떠난 그해 사월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꽃을 반기지 못했다.


봄이 오는 것이 두렵다.
햇살과 꽃잎과 바람과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부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엘리엇는 『황무지』에서 말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는다고.


나는 그 말의 뜻을 안다.
그녀가 떠난 날, 꽃이 피었고
나는 죽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봄이 오면, 나는 이곳에 없을 거야.”
나는 웃으며 그 종이를 접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사월이 오고, 그녀는 사라졌다.


기억은 종잇조각보다도 가볍게 바람에 날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진달래꽃을 깔아주지 못했다.
김소월의 시처럼 “가시는 걸음마다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말하지 못했다.


사랑은 품격 있게 끝맺을 줄 알아야 한다지만
나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떠났고
나는 끝없이 무너졌다.


그 후로 나는 『사월 이야기』 같은 영화를 보지 못했다.
이와이 슌지의 그 봄빛 가득한 풍경은
내게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기차에 몸을 실은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내게 봄은 기다림이 아니라 포기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을, 이제는 부르지 않기로 했던 계절.


Simon & Garfunkel은 노래했다.
“April come she will
May she will stay
June she’ll change her tune…”


그녀는 왔고, 잠시 머물렀고,
결국 나를 잊었다.
음표 사이의 침묵이 나를 찢었다.
그 짧은 노래가 내 인생 전부처럼 느껴졌다.


프루스트는 마들렌 조각 하나로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렸다고 했지만,
나는 사월의 냄새만으로도
그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비 내린 후의 땅냄새,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꽃향기,
햇살에 젖은 골목…
그 모든 사월의 풍경은 그녀의 흔적이다.


고흐는 아몬드나무를 그렸다.
하늘을 향해 터지듯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그는 삶에 부서진 채로
봄의 환상을 붙들려 애썼다.


그 아픔을 나는 안다.
나 역시 찬란함이 고통이 되는 사람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견딜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사월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는다.
한 사내가 눈 덮인 들판을 걷는다.
사랑을 잃은 자의 여정.
사계절 중 봄을 지나 겨울까지 가는 그 여정 속에,
나는 그의 마음을 본다.


사랑이 끝난 후, 인생은 오로지 걸음뿐이다.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앞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끌고 가는 것이다.


모네의 수련은 물 위에 떠 있고,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꽃은 흔들리는데
마음은 더 깊이 가라앉는다.


그녀가 내 마음속에서 떠올랐던 그날처럼,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부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을 안 자는 침묵한다고 했다.
나는 그 침묵 속에 산다.
웃지 않고, 말하지 않고,
다만 매년 사월이 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베이컨의 뒤틀린 자화상처럼
내 마음도 일그러져 있다.
그녀가 남기고 간 건 따뜻함이 아니라 공허였다.


이토 준지의 그림처럼,
사월의 햇살조차 내게는 기이한 악몽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앉았던 벤치에 간다.
누가 봄을 이야기하면
나는 그 말을 삼켜버린다.
사월은 나를 배신했고
그녀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마침내 사월이 진다.
꽃은 졌고, 웃음은 사라졌고,
기억은 하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월을 사랑한다.
나는 사월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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