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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명절 음식

-추석이 온다. 혼자 사는 홀아비의 가을에도...-

by 이안

내일은 추석이다.

아내와 이혼하고, 늙은 홀아비로 제주에서 혼자 살다 보니까,

전(煎) 같은 명절 음식이 먹고 싶어 져서, 서울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김치전 어떻게 하는 거예요"

“묵은지 쫑쫑썰고, 밀가루는 있냐? 부침가루는 간을 안 해도 된다.

너무 되면 딱딱헌께, 물을 섞어 노고롬히 해갔고, 딱 2장만 해서 먹어라. 혼자 사는데 많으면 냄깅께.

부침가루는 비싼 거 사지 말고, 작은 거 사라. 계란을 풀어 넣으면 전이 더 보두러워진다.”


전화로 들리는 어머니의 레시피는 별다른 게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인터넷에서, ‘끝내주는 백종원 김치전 레시피’를 찾아서, 만들 걸 그랬나 싶다. '헤어져 살더라도 이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엄명'을 듣지 않았다고, 최근 몇 달 어머니와 아슬아슬한 신경전 중이었는데, '엄마표 김치전' 때문에, 자존심을 죽이고 먼저 전화를 한 게, 좀 억울하기도 했다.


원래 어머니는 피터팬 PD가 혼자 사는 제주로, 9월 중에 내려오시기로 하셨다. 아무래도 막내아들을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작정하신 듯했다. 하지만 8.15 광화문 집회 발 코로나 확산 때문에, 기약 없는 다음으로 막내아들과의 해후를 미루셨다.


‘아들아, 어머니가 네 생각에 매일 밤 우신다. 그러니 제발 혼자 제주도에서 그렇게 살지 말고, 말 좀 듣고 올라 와라. 이제 내 나이도 아흔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서 살아서야 쓰겠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 우는 듯 애원하고 계셨다.


지난 3월이었다. 내가 아내와 헤어지기로 합의를 하고, 다시는 서울에 올라가지 않고 제주에서 홀아비로 살다가 죽겠다 결심하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은. 부모님께는 말씀도 안 드렸다. 어찌어찌 두 손자들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져누우셨고, 며칠을 우셨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늘 마음이 더 약하시고 막내아들 걱정이 많으셨던 아버지한테서 수십 통의 전화가 왔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고도 통화하지 않고, 제주도 성산의 바닷가 마을에서 술과 잠, 잠과 술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다.


가끔 눈이 부시게 햇빛이 쏟아질 때면 섭지코지 바닷가를 걸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쨍한 햇빛보다도, 청푸름 가득한 높은 하늘보다도, 제주도의 바다가 더 파랗고 아름다웠다.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싶었다.


헤어지기로 합의했지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내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나의 두 아이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회사 일과 개인적인 일정에,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가장이지 못했다는 유죄는, 이렇게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이별 통보로 단죄받게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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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올 3월에 머물던 제주도 성산의 바다. 피터팬 PD는 이후 종달리를 거쳐 표선면에 머물고 있다 >


부모님과 연락을 두절하고 살다가, 제주에서 두 달인가 지나고 나서부터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고맙다고’만 말씀하셨다. 어머니와도 몇 번의 통화를 했었는데 어머니는,


“밥은 잘 먹고 있냐 반찬은 어떠냐? 다 사서 먹는 거 아니냐? 그런 건 다 중국산 이니까 안된다. 내가 장조림이라도 해서 보내주마. 뭐 먹고 싶은 거 읎냐? 아무래도 내가 제주도 집에 가서 며칠 있어야 쓰겄다”


오로지 내 밥과 반찬 걱정만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아내와 20년을 사는 동안 매주 꼬박꼬박 총각김치, 파김치, 배추김치, 갓김치, 백김치 온갖 김치에, 장조림, 무채 무침, 양념 오이지, 취나물, 버섯무침, 시금치 등의 온갖 밑반찬, 그리고 쇠고기 뭇국에, 토란국, 추어탕에, 육개장까지 직접 만들어 싸 주셨지만, 며느리가 기뻐할 칭찬은 단 한 번도 안 하셨다.


아내에게는, ‘넌 이걸 못하고,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라. 너네 집엔 안 간다. 너 해놓고 사는 꼴 보기 싫다’. 이런 식이셨다. 매주 아들과, 두 손자에게 음식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시어머니의 역할을 넘치게 한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아내는 먹는 거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훨씬 더 그리운 사람이었다. 아내는 내게도 그랬던 거 같다. 돈보다도 사회에서의 내 지위 보다도, 남편과의 진솔한 소통을 훨씬 더 갈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기질의 아내였던 만큼, 사람과의 소통과 인간관계에서는 백점이었지만, 음식이나 청소, 집안 살림에 있어서는, 스스로 '나는 살림 꽝, 주부'라면서 힘들어했다.


반면 피터팬 PD는, 전라도 음식을 제대로 만드는, 전남 담양 출신의 어머니 음식을 유별나게 좋아했었다. 어머니의 김치에서는 사다 먹는 김치처럼 쉽게 질리지 않고, 쉬이 물러지지도 않는 짠짠 하면서도 야무진 맛이 났다. 쉬어버려 콤콤 해진 쉰 김치에서도, 세월의 퇴색 속에도 고고함이 더 빛나는, 조선의 궁궐 같은 오래됨의 미학, 자꾸 음미하고 싶은 맛이 났다.


어머니는 전라도식으로 여러 가지 젓갈을 쓰시기도 했는데, 멸치젓을 넣으면 살짝 비리면서도 깊은 맛이 났고, 새우젓을 넣으면 또 그것대로 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소금만으로는 빈틈을 메울 수 없는, 풍미가 났다. 갓 담근 갓김치에서는, 찡하니 코를 찌르는 쌩한 맛이 났는데, 그 얼큰한 화딱지 나는 활어의 땡땡함 같은 맛에, 밥을 자꾸 뜨게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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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엔 명절 음식도, 어머니의 무나물도 없으니, 대신 감자를 삶았다. 소박한 음식이라도 음식에는 항상, 소중한 추억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힘이 있다>


피터팬 PD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장조림을 담그는 날엔, 좋은 양지머리를 사다가 간장에 오랜 시간 조리셨는데, 초등학교 오후반이었던 나는, 고기간장 육수의 짠내 나는 달큼한 향이, 온 집안으로 퍼져가는 걸 좋아했다. 누구는 이런 짠내가 싫을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장조림은 요즘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맛만 강하면서 흐물거리는 맛이 아니었다.


고소하면서 간장 육수의 깊은 맛이 났고, 인위적인 단맛은 거의 나지 않았지만, 검은 짠맛 속에 블랙 초콜릿의 중독성 같은 거부할 수 없는 맛이 배어있었다. 양지머리와 간장이 만나서 탄생한 오묘한 조화랄까?

결대로 잘 찢어놓은 양지머리도 시중의 장조림처럼 물컹 씹히는 맛이 아니라, 단단함을 갖추고 있으면도 식감이 좋게 씹혀서, 껌처럼 자꾸 씹어 댔는데, 그럴수록 새로운 맛이 계속 났다.


어머니가 오전 내내 장조림을 조리다 보면, 학교에 입고 갈 내 옷에서, 간장 고기육수 냄새가 배어났고, 학교 수업시간에도 그 냄새가 코끝을 계속 스쳐서, 빨리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으로 장조림 반찬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의 숙주나물은 또 어떠했나? 명절이면 빼놓지 않으셨던 무나물과, 들깨를 잘 갈아 무친 머웃대는 또 어떠했던가? 어머니의 숙주나물은 나의 두 아이들도 무척이나 좋아해서, 어릴 때 채소를 싫어했던 두 아들도 맛있게 먹곤 했었다. 숙주나물은 쉽게 쉬어버린다지만, 싱거운 듯 간이 적당히 잘 배어 있는 어머니의 숙주나물을, 젓가락으로 크게 집어 한입 가득 씹어 먹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져온 첫날 다 먹어버리고, 쉬어서 버린 적이 없었다.


마늘을 잘 으깨 넣어 오랜 시간 삶은 무나물은, 명절 상에 올린 뒤에도,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밥에 넣고 양념장과 함께 비벼 놓으면, 바라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특히 나이가 드시면서 먹는 양이 줄어들어 막내아들을 속상하게 했던 아버지도, 어머니의 무나물이 있으면, “큰 대접 이리로 갖고 오니라” 하시곤, 무나물과 양념장을 뜨거운 밥 위에 얹고, 슥슥 삭삭 비벼 한 그릇을 비워내셨다.


오늘 오후에 제주도 표선면을 산책하다가, 이랑과 고랑을 단정하게 파놓은 넓은 무 밭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있는 걸 봤다. 우리나라에서 무는 가을에 파종을 하고, 김장철에 크게 한번 수확을 하고, 남은 무는 봄까지 땅속에 계속 둔 채 수확을 이어간다. 땅 위로 머리를 내민 무의 새싹을 보니, 어머니의 무나물과 명절 음식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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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밭 너머, 제주의 돌담 너머, 그리고 한라산 너머로 붉은 해가 지고 제주도의 추석이 온다. >


어머니도 이젠 여든 하고도 중반이 넘으셨고 미각이 떨어져서, 명절 음식이 예전 같지 않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에 사는 유일한 자식인 피터팬 PD도,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손자들도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차례상에 올릴 명절 음식에 더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고 한다.


자손이 찾지 않는 추석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하셔서,

"올 추석은 코로나도 있고 하니, 올라오지 못하는 거 이해한다. 우리보다 네가 걱정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혼자 보내는 추석이라고, 외롭다고 생각하지 마라.

혼자 있는 동안,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봐라"라고 말씀하셨다.


명절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손자들을 못 보게 된 어머니는, '이제 차례상은 누가 차리고, 누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냐' 하며 한숨이셨다. 어머니의 명절 음식이, 더 이상 며느리에게 전수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고 계셨다.


추석이 온다.

제주에서 혼자 사는 피터팬PD의 가을에도,

서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맞고 있는 가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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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오늘 밤 비가 내리고 있다지만 제주도엔 둥근 보름달이 떴다. 피터팬PD는 러시안 블루 냥이 키키와 함께, 올 추석의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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