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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표선항에
휘영청 한가위 보름달이 떠도...

-피터팬 PD의, 길냥이들과 추석 보내기-

by 이안

내일이면 내가(=피터팬 PD) 지구별에 태어나서, 52번째로 맞는 추석이다. 그리고 피터팬 PD의 생애에서, 혼자 보내는 첫 번째 추석이기도 하다. 하필 처음으로 맞는 나의 솔로 추석인 올해에는, 추석 연휴가 참으로 길기도 하다. 2~3일 정도로 짧았다면, '뭐, 주말에서 하루 더 쉰다~', 하는 기분으로 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섬에서 혼자 사는 외로움을 떨쳐버리기에는, 너무 긴 연휴이다.


연휴가 길다 보니, 지금이 혼자 보내는 추석이라는 걸, 자꾸 ‘확인사살’하게 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곳 제주도에는 민족의 대 명절을 상기시키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의 커다란 글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복궁과 창덕궁 등의 고궁을 찾는 인파가 몰리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서울에 살 때 명동과 강남 등의 백화점 앞을 지날 때면, 늘 디스플레이되어있던 커다란 선물 꾸러미 모형이나, 걸개그림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저께 27일, 표선면 오일장을 찾은 손님들이 평소보다 좀 많았고,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이, 이번 오일장의 주요 상품으로 등장했다는 거 정도이다.


하기야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귀성 혹은 귀경을 서로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대한민국 전체가 조용한 추석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피터팬 PD에게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민족의 대명절인지라, 어색하고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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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표선항에 정박한 배들 사이로, 한가위 보름달이 떠 있다. 표선의 고요한 바다 위에는, 하늘에 뜬 달보다 '더 기다란 달'이 일렁이고 있다.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88학번 동기들이 모여있는 단톡 방에, '피터팬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표선면의 맛집 [우동가게]에, 들러서 생등심 돈가스를 먹는 사진도 올리고, 부쩍 추워진 저녁 바람을 막기 위해서, 폼을 내고 쓴 검은색 비니와 늦가을 외투를 입은 사진도 올려봤다.


나는 제주도에서 우리 집 냥이 키키와, 외롭지 않게 잘 지내고 있고, 먹는 것도 너희들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있다. 그러니 내 걱정 말고, 너희들 추석이나 걱정해라!


라고, 톡을 보냈는데, 친구들은 겉으로만 나를 부러워했지 속으로는,


'피터팬 저놈 처음 맞는 솔로 추석인데... 잘 버티고 있나 모르겠네...
또 갑자기 죽겠다면서, 어디 낭떠러지 찾아다니는 거 아냐?’

하며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친구 놈들이, 나이를 먹다 보니 걱정만 늘고 있다. 노인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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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하루 앞둔, 제주도 표선면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일몰. 거대한 어른 한라산도, 하늘과 바다, 태양의 석양 아래서는 마치 '아기 산' 같다>


내 걱정을 하는 건지, 나를 걱정할 대학 동기를 걱정을 하는 건지, 아무튼 근심이 쌓이다 보니, 동병상련이라고,부쩍 추워진 가을바람을 맞고 있을, 표선항의 길냥이 [코코]가 생각났다.


며칠 전 표선항에 위치한 카페 [코코티에]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아기 길냥이 [코코]와 코코의 엄마를 봤는데, 코코가 비쩍 말라있었다. 올여름에는 피터팬 PD가 먹이를 챙겨줬었는데, 9월부터는 피터팬도, 러시안 블루 [키키]를 입양하고, 키키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표선항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이 한가위라서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밝고 환하게 빛났지만, 둥그런 달 속에는 불쌍한 [코코]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저녁을 먹은 후에, 표선항에 가보았다.


표선항 주변에는, 길냥이가 10~15 마리 정도 살고 있다. 코코와 코코 엄마는 주로 [코코티에] 주변에 살고,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냥이 5~6마리 정도는, [바다그림 펜션] 주위에 산다. 그리고 항구 끝에 위치한, [당포 회센터] 주변에도 5마리 정도가 사는데, 회센터 주변에 있는 냥이들은, 야외에 차려놓은 손님 테이블 앞에서 생선구이 몇 점을 얻어먹으려고, 늘 손님들의 테이블 주위를 어슬렁 거리고 있다. (그 외 피터팬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길냥이들이, 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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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표선항에 위치한 자연산 회 맛집 [당포회센터] 주변에는, 손님들로부터 생선구이 몇 점을 얻어 먹으려는, 길냥이들이 항상 몰려있다>


오늘은 피터팬의 차 트렁크에 사료를 싣고 갔는데, 바다그림 펜션 앞에서 코코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바다그림 펜션]의 사장님 내외분께서, '먹이 주러 오셨냐?'면서 피터팬 PD를 반겨주셨는데, 요즘 몇 마리가 새끼를 배서 숫자가 더 늘어 날지도 모른다고 하신다. 하지만 얼마 전에 태어났던, 5마리 새끼 중에서 3마리가 죽기도 했기 때문에, 올 겨울을 몇 마리나 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사장님네 내외분도 고양이를 2마리 키우고 계셨는데, 길냥이들에게도 먹이를 주신단다. 피터팬은 집에서 러시안 블루 [키키]를 키우면서, 표선항에 가끔 오면 코코와 코코 엄마를 돌봐 준다고 말씀드리고, 이러 저런 얘기를 나눴다. 사장님 내외분과 얘기를 나누고 생각해보니, 추석 하루 전인 오늘, 처음으로 사람과 30초 이상 길게 얘기를 나눠 본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일은 추석이다. 길냥이 코코, 그리고 피터팬이 집사로 있는 키키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의미 있겠으나, 국수마당 할머님이라도 찾아뵙고, 길게 사람의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올 추석이 쓸쓸하고 외롭지 않도록.


<영상을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다시 잘 보니까, 코코 엄마가 코코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어요. 코코는 좋은 엄마를 만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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