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네들은 맨날 싸우는데도, 붙어 다니고 참 희한해"-
99년 3월, 현관에서 신발끈을 묶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으셨다.
‘아들아, 너 정말 지리산 가냐?’
‘네, 1주일만 갔다 올게요’
‘그럼 네 책상 서랍에 있던 중국행 티켓은 뭐냐? 오늘 날짜던데’
‘...............................................’
‘엄마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못 가게 할까 봐 그랬냐?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갔다 와라. 연락 자주 하고’
1994에 12월에 입사해서 4년 동안 MBC 라디오 PD로 근무하다가, 부모님 몰래 1년 동안의 휴직계를 내고, 98월 11월부터 99년 2월까지 인도와 네팔에 머물렀었다. 인도 여행을 떠날 때도 부모님께는 ‘인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났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모든 정황이 의심스러웠던 아버지는, 회사 인사부에까지 전화를 해서, 나의 새빨간 속임수를 알아내셨다.
하지만, 1998년을 내내 술만 마시며 힘들어하던 나를 붙잡지 않는 게 낫겠다 생각하셨는지, 인도행을 말리지는 않으셨다. 공항까지 따라 나오셔서 건강하게만 갔다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2월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1개월을 쉰 뒤, '지리산에 1주일만 갔다 오겠다 '라는 거짓말을 하고, 다시 중국행 배에 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또 어딘가로 멀리 떠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지만, 당일 아침까지 내게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99년 봄 당시엔 인천항에서 중국 천진(天津)(티엔진)으로 출항하는 배가 많았다. 나는 제일 싼 3등 칸 티켓을 끊고, 천진까지 24시간을 항해할 배에 올랐다. 3등 칸에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보따리 상인’들로 가득했다. 조선족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중국에서 콩이나 고춧가루 등을 싸게 들여오고, 한국에서 인삼 같은 걸 내가는 거 같았다. 당시 인천 세관은 민간 보따리상에 대해서, 가방 1개 정도는 눈감아 줬었다.
가방 한 개의 콩이나 마늘에 대해서는, 개인의 필요로 구매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냥 넘어갔고, 또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등을 고려해서 눈감아 준 것일 수도 있으리라. 몇몇 아주머니들은 짐보따리가 2개가 넘어서, 짐이 없는 아저씨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보따리상인들끼리 서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이라서, 오며 가며 '상부상조'를 하고 있었다.
3등 칸 안에서 둥그렇게 모여 앉아, 밤새 화투를 치던 보따리상들은, 월요일에 다 같이 인천에서 출발하면, 수요일에 다시 천진에서, 함께 모여 같은 배를 타고 돌아왔기 때문에, 서로 형, 동생 또는 언니,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어린 대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 곁에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그중 한 청년은, IMF 때 주식으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의 큰돈을 벌어서, 1년 일정으로 중국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 청년은, 주식투자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막노동하던 때를 생각하니 비싼 티켓은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청년을 1주일 정도 후에 우연히 중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급히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1년 동안 여행을 한다면서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갖고 있는 주식이 자꾸 떨어져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돈이 사람의 주인인지 사람이 돈의 주인인지 헷갈리는 상황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주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도 중국 여행 후에, 불행하게도 주식에 손을 대고 크게 후회를 한 경험이 있다.
젊은 청년들과 누워있는데, 3등 칸 한쪽 구석이 소란스러워졌다. 형, 동생 하던 상인분들이 화투를 치다가 싸움이 붙었는지, 멱살을 잡고 서로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걱정을 하면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3등 칸의 다른 모든 아저씨 아줌마들은 늘 있는 일 인양, 본인들의 화투패를 멍하게 바라보거나, 한가롭게 누워서 그 상황이 웃기다는 듯, ‘쟤네는 맨날 싸워, 수요일 돌아오는 배편에서 또 싸울 거야, 참, 저런대도 맨날 붙어 다니고 희한해~’ 라며 그 상황을 농으로 퉁치고 계셨다.
<지금은 단속이 심해져서 보따리 상인들에 인한 농산물 반입물량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1998년 그때만 해도 인천항에 보따리 상인들이 제법 많았다. 중국으로 가는 3등 칸 배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던 사람들은 이젠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멱살잡이를 하던 두 아저씨는, 이내 다시 낄낄거리면서 화투를 쳤다. 한 명은 콩을 사러 간다 하고, 다른 한 명은 마늘 시세가 좋다는 자신들만의 일급 정보를 화투패 속에 함께 넘기며, 천진으로 가는 밤도 넘기고 있었다.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설 때는 잘 몰랐는데, 3등 칸의 밤이 깊어가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한숨이 뱉어졌다. 잘 다니던 MBC PD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걱정이 많으셨는데, 당시만 해도 오지에 가까웠던 인도와 네팔 그리고 중국으로 떠나는 아들이 이해되지 않으셨을 거다.
내일 새벽에 천진에 도착하면 하루를 묵을까? 어디서 잘까? 인도 여행을 할 때 마치 성경처럼 끼고 다녔던 ‘Lonely Planet’ 출판사의 가이드 북 [인디아] 편이 너무 좋아서, 중국으로 떠날 때도 같은 출판사의 [China] 영문판만 하나 갖고 3개월 여정을 떠나왔는데, 이번에도 나의 가장 소중한 여행 동지가 되어줄까?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오는 잠결에서도, 24시간의 항해에서 오는 뱃멀미와 피로가, 스멀스멀 3등 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가이드북 출판사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의 1998년 판 [China] 표지.>
--------- ( 내일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