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지각·의지·의식 또한
역시 그러하니라.
반야심경은 앞서
色即是空 空即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형상과 공이 둘이 아님을 설했습니다.
이제 그 통찰을
우리 존재의 더 깊은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受(수), 想(상), 行(행), 識(식) —
느낌·지각·의지·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공하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色)보다
마음(受想行識)에 더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서도
마음의 집착이 가장 강력한 속박임을 강조합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수(受)는 무상(無常)하고 고이며 무아이니라.
상 행 식( 想·行·識) 또한 그러하니라.
그대는 그것들에서 공(空)을 보아야 하느니라."
受(수)는 느낌입니다.
쾌·불쾌·중성의 감각적 느낌.
우리는 느끼는 순간
그 느낌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느낌 또한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흐름일 뿐입니다.
想(상)은 지각·생각입니다.
대상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작용.
우리는 생각을 '나'라고 여기고
그 생각의 내용에 끌려갑니다.
그러나 생각 또한
떠오르고 사라지는 흐름일 뿐입니다.
行(행)은 의지적 형성 작용입니다.
습관, 충동, 선택.
'내가 한다'라고 느끼지만
그 또한 과거의 조건들이 빚어낸 작용일 뿐입니다.
識(식)은 의식·분별입니다.
경험을 종합해 '안다'라고 여기는 마음.
그러나 의식조차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상응부=쌍윳따 니까야》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識(식)은 緣起(연기)로 생기고
연기로 멸하느니라.
識을 공하게 보는 이는
애착을 끊고 해탈하느니라."
受想行識는
우리 마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그 마음조차 본래 공하다고 비춥니다.
《금강경》에서도 이 통찰은 깊게 나타납니다.
凡所有心 皆是虛妄
(범소유심 개시허망)
"무릇 모든 마음은 허망하니라."
마음의 내용에 집착하면
그것이 곧 괴로움의 뿌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
공한 흐름임을 보면
자연스레 자유로워집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이 가르침을 심성(心性) 깨달음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육조 혜능은 설합니다.
"心若無住, 則無罣礙."
(심약무주 즉무과애)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걸림이 없느니라."
受想行識에서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그 마음은 본래 자유롭고 맑아집니다.
고려시대의 지눌국사도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설합니다.
"마음의 흐름을 보되,
그 고정된 본체 없음을 보라.
그리하여 마음에 걸림 없이 머물라."
그렇다면
이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쉽게 휘둘립니다.
느낌(受)이 올라오면
그것을 '나'라고 믿고
그 느낌에 끌려갑니다.
생각(想)이 떠오르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그 생각에 얽매입니다.
의지(行)가 작동하면
'내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의식(識)이 판단하면
그 판단이 절대적인 진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말합니다.
受想行識 또한 공하다.
그것들은
잠시 인연 따라 일어났다
잠시 머물고
곧 사라지는 흐름일 뿐이다.
《중아함경》에서도 부처님은 설하십니다.
"마음의 흐름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으니라.
그 흐름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자연스레 고요히 머물리라."
오늘 하루
느낌에 휘둘릴 때,
생각에 끌릴 때,
충동과 판단에 사로잡힐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속삭여 보십시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지각·의지·의식 또한
역시 그러하니라."
그렇게 보면
마음의 많은 집착이
저절로 조금씩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속에서도 자유롭고,
고요한 지혜로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