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초기경전 4.
생멸도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by 이안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증가도 없고 감소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이제
공성(空性)의 깊이를 한층 더 확장합니다.

앞에서는 오온(五蘊)이 공하다고 설했습니다.
이제는 존재 전체의 법칙에 대해 선언합니다.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기준 자체가 허망함을 드러냅니다.


초기경전에서도
生·滅(생·멸), 淨·穢(정·예), 增·減(증·감) —
이 모든 분별이
무상하고 조건 지어진 것임을 반복해서 설합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生(생)하는 것도 아니요,
멸(멸)하는 것도 아니니라.
인연 따라 나타날 뿐이며,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라."


生(생)과 滅(멸)은
마음이 만들어낸 분별입니다.
그러나 법(法)은
그저 인연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상응부》에서도 설합니다.

"비구들이여, 청정(淨)과 부정(不淨)을 분별하나
그 또한 분별일 뿐이라.
法은 본래 그러함도 아니며,
그르침도 아니니라."


우리는 흔히
깨끗한 것(淨)은 집착하고
더러운 것(垢)은 미워합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말합니다.
"그 또한 인연 따라 그렇게 보일 뿐,
그 본성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마지막으로 增(증)과 減(감) —
"무언가 늘어나야 좋고,
무언가 줄어들면 나쁘다"는
세속적 분별조차
본래 공하다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색(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소리로 나를 구하려 하면
그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자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이는
형상과 소리 —
증감·생멸·청탁 모두 분별된 마음에서 비롯됨을 경계하는 가르침입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이 구절이
선(禪) 수행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육조 혜능은 설합니다.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디에 티끌이 일겠는가."


고려시대의 지눌국사도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설합니다.

"생사와 멸함을 보지 말고,
정(淨)과 부정(垢)에도 머물지 말라.
증감(增減)의 마음이 끊어지면
지혜가 자연히 밝아지느니라."


그렇다면
이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는 매 순간
생멸의 분별 속에서 괴로움을 만듭니다.


"이 일이 시작되면 기쁘고,
끝나면 슬프다."

또한 깨끗함과 더러움에 집착합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그리고
증가와 감소에 집착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고,
덜 가지면 불행하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말합니다.

"이 모든 분별이 본래 공하다."

生도 없고, 滅도 없으며,
淨도 없고, 垢도 없으며,
增도 없고, 減도 없느니라.


《중아함경》에서도 부처님은 설하십니다.

"분별하는 자는 분별 속에 머물고
분별을 놓는 자는 법(法) 속에 머무느니라."


오늘 하루
생멸에 집착할 때,
청탁에 끌릴 때,
증감에 흔들릴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속삭여 보십시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증가도 없고 감소도 없느니라.


그렇게 보면
삶의 많은 번뇌가
조금씩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생멸과 청탁과 증감의 그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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