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공 가운데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
색도 없고,
느낌(受)도 없고,
지각(想)도 없고,
의지(行)도 없고,
의식(識)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은 앞서
생멸도 없고, 청탁도 없고, 증감도 없음을 설했습니다.
이제 더욱 철저하게
존재의 구조 자체를 해체합니다.
공(空)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이는 단지 부정의 선언이 아닙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의 뿌리를 근본에서 흔드는 지혜입니다.
초기경전에서도
이 사유는 매우 심오하게 전개됩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색이란 고정된 자성이 없느니라.
그대가 색에서 공을 보되
색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보라.
受·想·行·識 또한 그러하니라."
공(空)이란
고정된 실체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공을 통찰할 때
색·수·상·행·식이 본래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그럼 "무(無)"는 무엇을 뜻할까요?
《상응부》에서는 이렇게 설합니다.
"비구들이여, 법이 공하다 함은
그 법이 고정된 나, 나의 것,
혹은 영속적 본체가 없다는 뜻이니라."
그러므로 무색(無色)이라 함은
색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색을 고정된 실체로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도
이 사유는 더욱 철저히 나타납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형상(色)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공한 흐름을 보면
곧 여래의 지혜에 이릅니다."
受(수) — 느낌.
想(상) — 지각과 생각.
行(행) — 의지적 형성.
識(식) — 의식과 분별.
이 모든 것들 또한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일 뿐입니다.
그대가 그것들을 '나'라고 여기면
괴로움이 생기고,
그대가 그것들을 공한 흐름으로 보면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이 통찰을 선(禪) 수행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육조 혜능은 설합니다.
"若知 一切法空, 心自清淨."
(약지 일체법공 심자청정)
"모든 법이 공함을 알면
마음은 스스로 청정해지느니라."
고려시대의 지눌국사도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설합니다.
"法이 공한 줄 아는 이는
색·수·상·행·식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 마음이 고요하고,
그 행이 자유로우니라."
그렇다면
이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는
몸(色)에 집착하고,
감정(受)에 끌리고,
생각(想)에 사로잡히고,
의지(行)에 얽매이고,
의식(識)을 '나'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말합니다.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즉,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자아가 아니며,
집착할 대상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아함경》에서도 부처님은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법의 공함을 보는 이는
집착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는 색·受·想·行·識의 흐름을
맑게 관조하느니라."
오늘 하루
몸과 감정과 생각에 휘둘릴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속삭여 보십시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공 중 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
색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의지도 없고,
의식도 없느니라.
그렇게 보면
삶의 많은 괴로움이
조금씩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몸과 마음의 그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