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아랍 11.
벨푸어 선언과 유대 국가의 유령

by 이안

벨푸어 선언과 유대 국가의 유령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 공동체와 정의의 조건을 묻는 고대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구조를 통해 문명의 심층을 해석하는 인류학자


장소:
비잔틴 폐허 위에 앉은 두 사람. 멀리서 예루살렘의 실루엣이 저녁 햇살 속에 흐릿하게 드리운다.


소크라테스:
레비스트로스여, 우리가 앞서 살펴본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제국이 그은 선이 현실의 경계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통찰을 주었네.

그런데 나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떠오른다네.

어떻게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선언했을까?
그 당시 이 땅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 않은가?


레비스트로스:
그 질문은 “벨푸어 선언”으로 이어지지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는 한 장의 편지를 통해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을 팔레스타인에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그 약속은 누구에게 한 것인가? 유대인 전체? 아니면 누군가의 대표로?


레비스트로스:
실제로는 시온주의자 중 하나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것이 국제 정치의 문서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문제는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존재를 사실상 ‘삭제’한 채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닌 ‘기억되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준 셈이군.


레비스트로스:
예, 선생님. 영국은 제국의 이익을 위해 ‘하나의 민족’을 기억에서 꺼내 들고, ‘실제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잊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서사의 전복입니다.


소크라테스:
레비스트로스여, 자네는 그 선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가란 종이 위의 약속으로도 성립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
그 선언은 실제로 한 민족의 꿈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민족에게는 망각의 그림자를 드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중동의 분쟁을 드리우고 있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벨푸어 선언’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을 정한 것이었군.


레비스트로스: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선언은 국가라는 것이 ‘영토의 점유’ 이전에 ‘서사의 점유’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유대 국가의 탄생은 단지 군사적 혹은 외교적 결과가 아니라, 서사적 선취의 산물입니다.


맺음말


벨푸어 선언은 하나의 편지였지만, 그 편지 안에는 수십 년의 전쟁과 고통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한 민족의 기억을 소환하는 대신, 다른 민족의 현실은 지워졌습니다.


국가란 이처럼, 종종 잉크보다 더 무거운 운명을 만들어냅니다.
유령처럼 떠도는 ‘유대 국가’의 서사는 현실이 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여전히 국가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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