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열하일기 첫걸음 / 박수밀 / 돌베개> -3
“.... 지금 그대를 북경으로 보내며, 이를 잊지 못해 제 어리석은 정성이나마
곡진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타국의 군자가 뒷날 고국으로 돌아가서, 중국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도무지 없다고, 왜곡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열하일기 속 이 대목은 [성경잡지(盛京雜識)](성경의 이모저모)에 나온다. 성경은 지금의 선양을 말한다. 연암 일행은 선양에, 1780년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머물렀는데, 연암은 관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서 상인들과 필담(筆談)으로 교류하였다.
당시에 동아시아에서, 서로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 만나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흔히 했던 것이 바로 한자로 필담을 하는 거였다. 열하일기에 따르면 선양의 가게에서 만난 청나라 상인들은, 학문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연암의 빼어난 글솜씨와 학문적 깊이에, 처음 만난 청나라 상인들도 감탄해서 연암에게 송별 편지를 써준 것이다.
선양에서는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자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는데, 심양(=선양)의 가게에 걸린 기상새설이라는 글자를 보고, 연암은 ‘서리(霜:서리 상)를 업신여기고 눈(雪)과 우열을 다툰다’는 뜻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상인들이 자신의 정직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음씨가 서리만큼 깨끗하고, 흰 눈빛보다 더 밝다는 글귀를 적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몇몇 상가에 들어가서 연암의 글솜씨를 보여주자, 사람들이 모여서 연암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렸다. 그래서 연암은 내친김에 거리에서 본, ‘기상새설’이라는 글자도 써주었는데, 상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연암은 화가 나서, ‘이런 조그만 곳에서 장사나 해 먹는 놈이, 어찌 내 글자를 알아보겠는가!’ 하면서, 화를 내고 다른 가게에 들어가서 또, ‘기상 새설’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 상가에서도 연암의 다른 글귀에는, ‘아주 좋습니다. 좋아요’라며, 환호성을 지르던 청나라 상인들이 이,‘기상새설(欺霜賽雪)’에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연암은 참 괴상한 일이다 싶어 물었더니, ‘저희 가게는 부인네들의 머리 장식품을 파는 가게이지, 밀가루를 파는 가게가 아닙니다’ 하더라는 거다.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밀가루 가게에 붙이는 현판이었다. 주인의 마음씨가 고결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고, 밀가루가 서리보다 가늘고 눈보다 깨끗하다는 뜻이었던 거다. 머쓱해진 연암이었지만, ‘그냥 장난으로 써 보았소’ 라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연암이, '서리를 업신여기고 눈과 우열을 다툰다'라고 우스꽝스럽게 오해했던, 기상새설 (欺霜賽雪)은 밀가루 가게의 간판이었다.>
이 대목에서, 처음 보는 청나라 군중들도 환호성을 지르는 연암의 글솜씨와, 좌중의 이목을 사로잡는 그의 매력을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사건을 서술해가는 연암의 작가로서의 능력에 관심이 간다. 마치 한 편의 콩트를 풀어내듯, 청나라 상인들과의 코믹한 사건을 들려주고 있다.
열하일기에서는 이와 같은 연암의 유머 감각이 자주 드러나는데, 청나라 사람들의 상갓집 모습이 궁금해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상주에게 문상을 하고 부의금까지 주고 온 일이라던지, 연암이 잠이 들어있는 사이에 약대(=낙타)가 지나갔다는 하인들의 보고에, 아쉬워하며 ‘왜 자신을 깨우지 않았냐’며 하인들을 책망하고, 이어서 하인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낙타의 모습을 표현하는 글에도 재기가 넘친다. 연암은 이처럼 호기심이 넘치고,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한 탐험가 기질이 다분한 문인이었다.
"... 말이라고 하고 보면 발굽이 두쪽이고, 꼬리는 소와 같으며, 소라고 하기에는
머리에 두 뿔이 없고, 얼굴은 양처럼 생겼고, 양이라고 하기에는 털이 곱슬곱슬하고 등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머리를 드는 모양은 거위 같고
눈을 뜬 모양은 장님 같았습니다..."
<연암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조선 후기의 화가 이인문(1745년 ~ 1821년)의 낙타도. 이인문도 조선 사신을 따라서 북경에 갔다가 낙타를 보았다>
연암 일행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청나라 황제가 머무는 열하에 도착했는데, 술을 좋아했던 연암은 역시나 용감하게 열하의 술집 기행에도 나선다. 한 번은 술집의 이 층에 올라갔는데, 몽골과 돌궐 사람 수십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순간 연암은 ‘졸아서’, ‘잘못 왔구나’ 하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종업원에게 술을 데우지 말고 그냥 생술을 가져오라고 호기 좋게 소리치고는,
... 오랑캐들이 마시는 작은 잔은 뒤집어 버리고, 큰 사발을 가져오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술을 모두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뭇 오랑캐들이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오랑캐 하나가 일어나, 술 석 잔을 따르고 탁자를 두드리며, 내게 마시길 권한다. 나는 일어나서 사발 안에 있던 찻잎 찌꺼기를 난간 밖으로 던져 버리고, 석 잔 술을 그 사발에 모두 부어 단번에 호쾌하게 마셨다... -태학 유관록, 1780년 8월 11일-
이처럼 연암은, 술을 좋아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다.
연암은 열하에서 코끼리를 구경하고, 마술을 관람하고, 중국인 학자들을 만나, 밤을 새워 토론을 했다. 그중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은, 라마교의 우두머리인 판첸라마를 만나라는 황제의 명령이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첫째 제자인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고, 둘째 제자인 판첸 라마를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높이 받들며, 이들의 육신은 죽어도,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을 한다고 믿는다.
판첸라마의 판은 ‘지혜로운 자’를 뜻하고, 첸은 ‘위대하다’는 뜻인데, 연암 일행이 열하에 있을 때의 판첸라마는, 제6대, 마흔세 살이었고,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초청으로,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
건륭제의 고희 생일을 축하하러 동아시아 각국에서 온 사신 일행이 건룡제의 명에 따라서 판첸라마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영접을 했는데, 조선 사신 일행 사이에서는 이 때문에 큰 논란이 벌어졌다. 유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판첸라마를 만났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자칫 큰 환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사신 일행이 조선에 돌아온 이후,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捲堂)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권당이란 성균관 유생이 나라의 잘못된 일에 대해 상소하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성균관을 비우고 물러나는 일이다)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청나라를 찾아온 판첸라마를 위해서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가 지어준 사찰. 건륭제는 조선에서 온 연암 일행에게, 이곳에서 판첸라마를 영접하라고 명한다. >
그런데 판첸라마를 영접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들은 연암의 생각은 어땠을까?
이때 나는 마음속에 기발한 생각이 들며,
‘이건 정말 좋은 기회인데’ 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문제야. 지금 만약, 사신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기 멋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황제의 말을 거부하면, 명성이 천하에 울릴 테지. 그러면 황제가 군대를 내서 조선을 칠까? 아니지, 이건 사신이 저지른 죄인데, 어찌 그 나라에 대고 화풀이를 할까?
결국 사신들은 저 멀리 운남과 귀주 쪽으로 귀양을 가겠지. 내가 의리상 혼자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서촉이나 강남의 땅을 밟게 되리라. 강남땅은 그리 멀지 않으나, 광동 지방은 북경과 만여 리나 떨어진 먼 길이니, 내가 놀러 갈 일이 어찌 호화찬란하고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겠나?’
나는 마음속으로 기뻐 어쩔 줄 몰라, 곧바로 하인을 불렀다.
”빨리 가서 술을 사 오너라. 쩨쩨하게 돈 아끼지 말고, 이제 너와도 작별이다 “ -태학유관록 8.10-
과연 엉뚱한 천재, 연암답다! 이러니 정조가 후일 [열하일기]를 읽어 보고, 연암을 질책한 것이다. 하지만 연암은 이미, 유교니, 불교니, 서학이니 하는 인식의 장벽을 다 허물고, 모든 사상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교유해야 조선이 세계 속에서 더 큰 나라가 되고, 더 부강해질 수 있다는, ‘깨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조선 사대부들의 사고를 옭아매던 낡은 성리학에서, 훌훌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있던 지식인이었던 거다.
과연 사신은 청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서 판첸라마를 만났을까?
그렇다면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을까? 아니면 목이 칼이 들어와도, 절은 못 한다면서 버텼을까?
이 사건을 두고 조선에서는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까?
이후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께서 조선의 천재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보시거나,
[열하일기]의 최고 입문서인 [열하일기 첫걸음, 박수밀 교수저, 돌베개]를 보시면서 궁금증을 해소하시길 바란다.
올 해는 년 초부터 세계 곳곳에서, 바이러스로 인한 우울한 소식이 많이 들리는데, 18세기 조선의 천재 사상가였던, 연암의 글에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길 바란다.
PS. 조선 사신들과 판첸라마 사건에 대해서, 그들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많았으나, 조선의 국왕인 정조는 ‘인책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시 정조답다! 연암 박지원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조선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태평성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1761년에 청나라 궁중화가 그린 청나라를 방문한 해외 사신단의 모습. 맨 아래가 포르투갈 그 위가 인도, 제일 위가 조선의 사신단이다. 청나라는 조선을 문명국으로 우대했었다. 그림 속에 인도 사신단이 탄 코끼리가 보이는데, [열하일기] 속에도 연암은 코끼리와 서커스를 보고 무척 재미있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