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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Oct 05. 2020

유럽은 그리스가 만들어 놓은 계좌에서 이자를 받았다.

서평 [세계사 1,2 / J.M 로버츠, O.A 베스타 / 까치 ]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존 모리스 로버츠 (John Morries Roberts) 교수가 [세계사]를 펴냈던 1976년 이후, 이 책은 “지금까지 쓰인 세계사 중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다른 책에게 내어주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로버츠 교수가 4판 개정판까지 저술했고,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07년부터는, 그의 역사관을 이어받은 영국 학술원의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da)가 개정판을 내오고 있다. 국내의 까치 출판사에서 번역한 [세계사 1,2]는, 가장 최근 개정판인 2012년 제6판을 두 권으로 나눠 발행한 것이다.    

 

영국 학술원의 특별 회원인 아르네는 로버츠 교수에 대해서,

     

“놀랄 만한 역사가였다. 그의 한 권짜리 세계사는, 아마도 영어로 출판된 것 중에, 최상의 작업이 아닌가 한다. 내가 십 대 때, 작은 마을에서 자라며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이 포괄하고 있는 범위에 충격을 받았었다. 로버츠는 역사를 상술할 뿐 아니라 이를 전해준다. 그는 인류 발전의 큰 개요를 제시한다. 그 개요를 끌고 나가는 큰 이야기들의 방향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Roberts does not just recount history, he tells it; he presents the great outline of human development without losing track of the big stories that drove it forward.

* 로버츠 교수에 대한 헌사에서, 원문의 recount와 tell의 구분을, 단순히 <상술한다와 전해준다>라고 번역한 것은 오류이다원문에서 recount,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열을 의미하고, tell은 역사의 의미를 함께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는 역사의 복잡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 성찰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이를 간단하게 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로버츠 교수의 저서 [세계사]의 가장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로버츠 교수가 오랜 세월 연구해온 역사에 관한, 그의 통찰력과 사고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해 준 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량이 너무 방대하므로, 음악 PD 피터팬의 [세계사 1,2]-서평(2)에서는, 제3부 고전시대 중 [그리스인]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후 독자분들의 요청이 있다면 중세, 이슬람, 근대 유럽, 제1차 세계 대전, 과학혁명 등 다른 시대에 관한 서평도 올리도록 하겠다. 내일 쓸 서평(3) 말미에는,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서 필자가 아쉽게 생각한 것 중,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 그리스는 4세기 이내(400백 년 동안)에 철학, 정치학, 산술과 기하학의 대부분, 그리고 수많은 서양 예술의 분야들을 창조했다. 설혹 그다지 유익하지 못한 그리스의 실수들이 있었다고 해도, 이로써 충분할 것이다.
유럽은 언제나 그리스가 만들어 놓은 자본에서 이자를 받아먹었고,
유럽을 통해서, 나머지 세계도 같은 계좌에서 거래를 했다”
 

<아카데미아 : 플라톤이 아테네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학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기원전 387년 경에 세워져서 기원후 529년경까지, 플라톤 학파의 교육기관으로 활용되었다. 그리스 시대에 철학과 학문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로, 아카데미아가 있었다 > 


로버츠가 교수는 그리스 문명의 성과에 대해서 위와 같이 평가하면서, [그리스인] 파트를 마무리했다. 

그럼 그리스가 인류에게 준 ‘자본’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 그리스인은 이 시대에 또한 정치를 발명했다.
즉 집단의 관심사를 공적인 자리에서, 선택 가능한 방안들을 놓고 토론을 통해서, 처리한다는 개념은 그리스인들의 것이었다. 그들이 행한 일의 중요성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politics(정치), political(정치적)이라는 단어에 살아있다.
이 용어들은 그리스어에서 도시를 뜻하는 말, 곧 polis(폴리스)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의 삶의 뼈대였고, 경제적 이유로, 한 자리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이었다...

폴리스 내에서 시민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폴리스의 삶에 관여했다.
우리의 기준에는 과도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폴리스는 그 규모 덕분에, 정교한 관료제 없이도 존립이 가능했다.
전체 주민의 극히 일부분이었던 시민단은, 언제나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피터팬 PD는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오랜 팬이기도 한데, 투키디데스의 저서를 읽으면서,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건, 아테네 시민들과 그리스인들은, 치열했던 전쟁의 긴박한 순간에도, 도시국가의 중요한 사안과 관련해서는, 늘 광장에 모여서 토론을 하고, 시민들 다수의 의사를 물어 결정을 했다는 점이다.      


스파르타와의 30년 동안의 전쟁 중에, 칼과 창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는 험악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고, 전염병도 창궐했기에, 패닉에 빠져서 이성을 잃을 만도 한데, 그리스인들은 최대한 민주정의 절차를 따르려고 했었다. 


이에 대해 로버츠 교수는, 


“... 이런 배경에는, 거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서, 권력이 왕에게서 귀족으로
전이되면서, '군사 귀족의 용기'에 대한 집착이,
‘단호한 자기주장과 독립성이 지속되는 현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족의 유대에 의한 귀족계급의 지배는 다시,
일반 시민단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정]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그리스 폴리스에서만 이토록 일찍 민주정이 발달했는가? 에 관한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왜 유독 그리스에서 철학과 문학 등이 너무나도 일찍 꽃 피었는가?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폴리스들이 위치한 환경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는데, 폴리스들은 대부분 인구가, 2만 내외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섬들은, 대부분 토양과 기후 때문에 매우 좁은 지역에서만,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돌이 많은 언덕이나, 낮은 산이 주위를 에워쌓다. 이러다 보니, 비교적 적은 면적의 정착지에 하나씩, 대략 150개 정도의 폴리스들이 번성하게 되었고, 바다와 산맥으로 가로막힌 각각의 폴리스들은, 아테네인, 테베인, 이오니아인, 이런 식으로 나름의 개성과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지형과 기후 때문, 에 작은 지역의 도시 국가(=폴리스)로 나뉘게 되었고, 이런 지형적 요인은,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생존을 위해서 개성과 독립심을 키워내게 하였다. 시민들의 이런 기질은, 그리스 민주정을 정착시키게 된다. >


폴리스의 이와 같은 개성과 특징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성과 자주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기질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가 종속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그리스가 이집트와 페르시아 같은, 거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거대 제국이란, 판에 박힌 규율을 받아들이려는 의향이 있거나, 강력한 독재자가 이를 강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민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스 시민들의 자주성은 창의성으로 이어져서, 기원전 7-8세기에, 그리스 군이 [팔랑크스 대형]이라고 알려진, 군사적 혁신을 이룩하게 했다. 이 진형은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간인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면서 우수정을 입증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궁병들과, 경보병들은, 팔랑크스 대형을 이룬 그리스의 방패 벽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팔랑크스 대형은,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간인 기원전 470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도 사용되었다. (팔랑크스 : 지름 약 1미터의 둥근 청동제 방패, 청동 투구, 청동/가죽/삼베 등으로 된 흉갑과 정강이 싸개, 길이 2~2.5미터의 철창과 단검으로 무장한 밀집대형). 


사실 알렉산더 대왕이, 단기간에 인도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혔던 것도, 그의 창의적인 팔랭크스 대형과, 송곳처럼 예리하게 적의 심장부로 파고드는 진법의 덕이 큰데,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군의 양쪽 날개를 분산시킨 후, 중앙으로 파고들어서, 다리우스 대왕의 30만 대군을 일거에 패퇴시킬 수 있었다.      


<그리스 군단의 팔랑크스 대형 : 지름 약 1미터의 둥근 청동제 방패, 청동 투구, 청동/가죽/삼베 등으로 된 흉갑과 정강이 싸개, 길이 2~2.5미터의 철창과 단검으로 무장한 밀집대형. 그리스는 팔랑크스 대형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놀라운 업적 중 또 하나는, 근세까지도 인류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철학적 질문과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위대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왜 갑자기 쇠퇴하고, 역사의 무대를 로마에 넘겨주게 되었을까?     


가장 큰 요인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긴 전쟁을 들 수 있다. 이후의 내용은 다음 서평에서 다루기로 한다. 


------------(서평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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