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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Oct 06. 2020

왜 역사학자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매료됐을까?

-[서평] [세계사 1.2/J.M. 로버츠, O.A베스타/까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나,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바로 읽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 책의 저자들이, 책 속에 쓴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깊은 사고의 힘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자들 역시, 깊은 생각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야,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철학책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쉬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등을 바로 읽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이 왜,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간의 세월의 마모를 이겨내며, 여전히 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지에 관한,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이 책들이 주는 보석 같은 깨달음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이 된 원전을 읽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해당 주제에 대해서, 최초로 사고를 했던 저자들(칸트, 노자, 애덤 스미스, 투키디데스 등등)의, 생각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실제로 [순수 이성 비판]이나 [국부론]을 통해서, 칸트와 애덤 스미스가 전달하고 했던 ‘내용’보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사고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관해서 깨닫게 되는 게, 원전을 통해서 독자들이 캐게 되는, 가장 큰 보물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서, 마치 셜록홈즈나 [비밀의 숲]의 황시목 검사의 입장이 되어서, 위대한 저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가에 관한 과정을 훔쳐보고, 추리해보는, ‘놀랍고 신비로운 과정’이 바로, 독자들에게 사고의 확장과, 지혜를 쌓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게 된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00년도 훨씬 지난 과거에 쓰였지만, 단일 사건에 관한 가장 위대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기전체( 단순한 연대순의 서술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주요한 인물의 전기, 제도와 문물, 경제 실태, 자연현상 등을 분류하여 서술함으로써, 각 시대의 특징과 변동을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역사 서술 방식)로 쓰여서, 역사 서술의 모범을 최초로 제시한, 위대한 역사서이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상고시대의 황제(黃帝)∼한나라 무제 태초년(B·C 104∼101년)까지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통사(通史)이기 때문에, 그리스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30년 전쟁이라는, 단일 사건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와 직접적인 비교는 곤란하다.


(참고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관련해서는, 천병희 선생이 영문판이 아닌,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책이, [솔] 출판사에서 나와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초심자에겐, 미국 예일 대학의 도널드 케이건 교수가 쓴 책을 권한다. 국내에는 까치에서 축약본을 냈지만 번역에 문제가 있고, 휴머니스트에서 [투키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가 박재욱 교수의 좋은 번역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절판이 되어서 도서관에서 대여를 해야만 읽을 수 있다.)     



<투키디데스가 저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10세기경에 필사한 문서.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의 전투 중, 패배한 것에 대한 희생양으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한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치욕에서 [사기]를 집필했던 것처럼, 투키디데스는 추방령을 받고 나서, 인류의 가장 소중한 기록문화유산 중 하나가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하게 된다.>


그럼 오늘의 주제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서, 옥스퍼드 대학의 로버츠 교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 페르시아 전쟁은 미칼레 전투 이후, 30년 동안 이어졌지만, 그 자체로서 보다는, 보다 중요한 사태의 배경으로서 의미를 가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그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생존이 확실해지자, 한숨을 돌리고 자신들의 헤일로타이 노예에 대한 걱정으로 귀환해 버렸다. 그 결과 페르시아인의 압제에서, 다른 폴리스들을 해방하는 과업을 추진하려던 나라들에게, 아테네는 확고한 지도자가 되었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싸울 공동의 함대를 유지하지 위해서, [델로스 동맹]이라고 불리는 연합체가 탄생했고, 그 지휘권은 아테네에게 부여되었다...

이후 동맹은 점차 아테네 제국으로 변했다.... 동맹의 절정기에는, 150개 이상의 국가가 아테네에게 공납금을 납부했다. 스파르타는 국내의 노예 반란 문제가 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아테네가 대외적인 책임을 맡는 것에 대해서 초기에는 만족했다. 하지만 스파르타 역시, 다른 국가들처럼 조금씩 상황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아테네의 헤게모니가 그리스 국가들의 내정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급격히 증가해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아테네의 제국주의적인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대항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460년부터~기원전 404년까지 27년간의 전쟁을 이어갔다...”     

이상의 설명이, 당시 그리스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가장 큰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왜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더 거대한 다른 투쟁이 있었음에도, 2,500년 전에, 그리스 세계에서 27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에 그토록 매료되어왔을까?


로버츠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답은 회피하고, 후회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는데, 로버츠 교수의 설명을 기초로, 피터팬 PD의 의견을 함께 첨부하면 아래와 같다.       


1. 그리스 문명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정신의 성취 즉, 철학적 사고의 힘과 민주정의 건설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는, 폴리스 국가 전체에게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제국주의화되어 갔고, 결국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 전체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 점은 이후 오랜 인류 역사에 걸쳐서 시사하는 바가 큰데, 16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은, 그곳의 고유 문명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멕시코, 브라질 등의 국가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열강들의,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 역시, 21세기 현재까지도, 아프리카에서 학살과 분쟁이 끊이지 않게 했고, 아프리카의 고통은 범 지구적으로 인류의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제국주의는 아테네인 사이에서 진정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수익에서
한몫을 기대했고, 제국이 짊어져할 부담은, 질 필요가 없다고 기대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어떤 제도 보다도 더, 친족의 정치적 유대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고, 이는 그리스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정작 이웃 도시 국가들에게는, 패권주의적인 행태로 군림하다가, 결국 그리스 세계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2. “...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 스파르타는 확고한 승리를 위해서,
적국인 페르시아의 원조를 구하게 된다. 그 대가로, 소아시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다시 한번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는 것을 비밀리에 묵인했다. 이를 통해 스파르타는 함대를 조성했고, 중요한 해전에서 아테네를 패배시킬 수 있었으며,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떨쳐버리고자 했던, 폴리스 도시국가들을 도울 수 있었다... “


하지만, 여기에는 스파르타의 자가당착적 오판이 있는데, 폴리스 국가들을 도운다는 명목 아래, 아테네를 무찌르고 자신들이 그리스 문명국가들 사이에게서 패권을 쥐려고 했으며, 또한 페르시아의 도움을 얻고자, 일부 국가들이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는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국내 일부 세력이 외부 세력과 결탁해서, 국가와 국민을 비극으로 이끈 사례들이 여럿 있다.)      


3. ”...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아테네의 토기 제작 기술로 볼 때, 폴리스들 사이에서 아테네는 상업과 예술의 선도자로서의 자질을 가졌다. 그리스산 제품들 중에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아테네의 주된 수출품이었고, 덕분에 부실한 경작지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충분한 곡물을 보유할 수 있었다...

전쟁 전에 그리스 문명은 이미 상업과 예술이 부흥했고, 화폐경제가 도입되면서,
 물물교환경제에서는 성취할 수 없었던, 급격한 자본의 축적까지 가능했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활력을 띠고, 상호 교류가 활발했던 아테네의 폴리스 시민들은 에게해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에 그리스산 제품들은 멀리 스웨덴에서도 나타났고,
기원전 6세기 바이에른의 요새에서도 그리스 양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토지에만 의존하는 가장 보수적인 경제체제를 갖고 있는 스파르타는,
역시 가장 보수적인 사회구조와 정치체제를 유지해왔다... “


이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물적, 인적, 교류와 소통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미 2,500년 전에 형성됐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경제구조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 세계 이후 인류 역사에서 진행된, 노예제도-> 봉건제도-> 자본주의 제도로 이어지는 경제체제가, 해당 시대의 정치체제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었나에 관한 설명도 가능했던 것이다.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태양의 후예]에도 등장해서,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그리스 이오니아 해에 위치한 자킨토스섬. 이처럼 아름다운 바다와 섬에 살던, 2,500년 전의 그리스 사람들이, 후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 너무나 크다>


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30년간의 원초적인 전쟁(비행기나 대포 등 기계문명이 아닌, 창과 화살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오롯이 의존한 전투) 동안, 인간의 인식과 심리의 변화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가장 긴박하고 위험한 시기에,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행동하는 가에 관한, 놀라울 만큼 생생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 로버츠 교수가 저술한 [펭귄 세계사] 중, [그리스] 편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까치]에서 펴낸 [세계사 1,2]의 번역과 관련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첨언에서 다루겠다.    


PS.1                     

로버츠 교수는 역사를 상술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전해준다 :( [세계사, 1], 11페이지, 4번째 줄)
Roberts does not just recount history, he tells it; he presents the great outline of human development without losing track of the big stories that drove it forward.
로버츠 교수에 대한 헌사에서, 원문의 recount와 tell의 구분을, 단순히 상술한다, 전해준다라고 번역한 것은 아쉽다. 원문에서 recount는,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열을 의미하고, tell은 역사의 의미를 함께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PS2.                     

이들 중 몇몇은 에게 해로 귀환했을 것이고, 새로운 사상과 인상을 가져왔을 것이다  ([세계사, 1] 219페이지, 17번째 줄)
Some of these men must have returned to the Aegean, bringing with them new ideas and impressions.
*원문의 impressions을 ‘너무도 정직하게’, 인상이라고 번역한 것 역시 아쉽다.



PS3.                     

그러나 그리스 사상은 그토록 중요한 역사적 잔여물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어떤 문명들보다 더 강조점과 경향에서의 변화를 반영한다. (243페이지, 1번째 줄)
But in spite of such important historical residues, Greek thought, more than that of any earlier civilization, reflected changes of emphasis and fashion.     
이와 같은 어색한 번역은, 이 책의 전반적인 개성(?)인데, 특히 원문의 residues를, 잔여물이라고 번역한 것도 많이 아쉽다. 원문에 residues는 그리스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을 의미한다.



PS4.                     

“... 더 오래된 문명들의 큰 강 유역과 같이, 그러나 또 다른 이유에서 에게 해는 문명의 형성에 적합한 장소였다...” [세계사 214P. 넷째 줄/ 까치]
Like the old river valleys – but for different reasons – the Aegean was a propitious place for civilization-making.
(* [또 다른]을 [또다른]이라고, 우리말 띄어쓰기가 틀린 것도 아쉽지만, 영어문장에서 ‘-(대시)’가 사용된 문장을 위처럼 번역하는 것도 아쉬움이 든다.         


       

PS5.                     

그러나 그리스인은 무엇보다 시인이며 철학자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들의 업적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핵심적인 것은 바로 정신의 성취이다 (235페이지, 5번째 줄)
Yet in the end the Greeks are remembered as poets and philosophers; it is an achievement of the mind that constitutes their major claim on our attention.     
영어에서 ;(세미콜론)을 위의 번역처럼 ‘그리고’라고 번역하면 안 된다. 이렇게 번역하면, 앞 문장 즉 ‘시인이며 철학자로 기억된다’와, 뒷 문장의 연결이 단절된다. 원문의 뜻을 살리려면, "... 시인과 철학자로 기억된다. 이점이 바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리스인의 정신적 성취이다"라고 번역해서, 뒷 문장이 앞 문장을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물론 피터팬 PD는, 국내 출판사 [까치]에서, [펭귄 세계사]를 출판하는 용기를 낸 점에 대해 높이 평가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쓰인 세계사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존 모리스 로버츠’ 교수의 역저를 출판할 때, 좀 더 세밀하게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차후 개정판에서 좀 더 좋은 번역본으로, [세계사 1,2]를 만나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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