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진리를 훼손하는가 — 구마라집의 침묵과 현장의 고집
진리는 말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번역은 단지 옮김이 아니라, 해석이며 창조이며 철학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불가피하다. 과연 번역은 진리를 보존하는가, 아니면 훼손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난다.
하나는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진리를 감싸 안은 구마라집,
다른 하나는 개념의 정확성으로 진리를 직시한 현장이다.
4세기말, 중국 후진의 장안에 등장한 구마라집은 쿠차 왕국 출신의 고승이자 불교 번역의 혁신가였다. 서역의 깊은 불교 전통 속에서 자랐고, 인도와 서역을 넘나들며 불교 논리학과 중관 사상을 철저히 익혔다. 장안으로 초빙된 그는 정치적 포로의 삶 속에서도 300여 권의 경전을 번역하며 후대 불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7세기의 당나라. 현장은 불경의 왜곡에 분노하여 직접 인도로 향한다. 나란다 대학에서 17년간 정통 산스크리트 불전을 수학한 뒤, 대당서역기와 함께 수백 권의 경전을 지닌 채 귀국한다. 그는 황제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번역원을 조직하고, 동아시아 불교 사상사에서 가장 정밀한 직역 체계를 완성한다.
구마라집은 “뜻을 살리되 말을 버린다”는 방식으로 의역을 지향했다. 그는 경전을 시처럼, 회화처럼 옮겼다. 중론이나 유마경의 경우, 인도 철학의 논리적 구조보다는 독자의 감각과 직관에 호소하는 유려한 문체로 번역했다.
반면 현장은 철저히 직역을 고집했다. 산스크리트어의 문법과 용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려 했고, 낯설고 긴 문장을 감수하면서도 개념의 정밀성과 일관성을 우선시했다. [대지도론]이나 [성실론] 등의 논서 번역은 후대 유식학과 법상종에 결정적 토대를 제공했다.
유마경의 한 대목
구마라집 번역: “마음이 고요하면 땅도 정토가 된다.”
현장 번역: “만일 보살이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국토도 청정해진다.”
전자는 간결하고 시적이다. 정토를 실현하는 방식이 곧 마음의 상태임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후자는 논리적이다. 보살이라는 주체, 국토라는 객체, 청정히 하다는 인과관계가 정확히 나뉘며 이론적 맥락을 살린다.
구마라집은 사륙변문(四六變文, ‘사륙문 형식을 기본으로 하되, 이야기성과 리듬감을 가미하여 경전의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문체’입니다.)을 활용하여 경전의 구절을 운율과 대구로 구성했다. 이는 독송에 용이할 뿐 아니라, 중국 문학 전통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친숙함과 감흥을 동시에 주었다.
반면 현장은 산스크리트 문장의 길이, 반복 구조, 복잡한 인과관계를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려 했다. 그의 문장은 때로는 장황하고 이해가 어렵지만, 철학적 개념을 정밀하게 전달하는 데 유리했다. 이는 현대 학술 번역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우리는 번역기를 사용하고, 딥러닝 기반 AI가 불경도 번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진리는 단순한 언어 대응이 아니다. 무아나 공 같은 개념은 기술로 번역되기 어렵고, 오히려 해석의 윤리와 사유의 깊이를 요구한다.
구마라집은 읽히는 경전을 만들었다.
현장은 진리를 정확히 옮기는 경전을 만들었다. 오늘의 번역자는 이 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선택할 것인가?
진리는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지며 드러난다.
다음 화의 질문 — 이어지는 사유의 불씨
만약 번역이 하나의 창작이라면, 구마라집은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써내려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