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생각해보는, 선조들의 순 한글 편지-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16세기 후반에 쓰인 순한글 편지의 일부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는 홀로 남은 아내의 심정을 그린 편지글이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어떠했던가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읽을수록 남편에 대한 아내의 절절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글이다.
그리고 한글이 아니었으면, 이토록 그리움이 아련히 묻어날까 싶은 글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껴줄까?'
결혼을 하고 십 년, 함께 누운 아내에게 나는 언제쯤 이런 말을 했을까?
이 편지가 1998년에 안동에서, 무덤의 이장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동안 일반 대중이 한글을 광범위하게 쓴 것은, 이 편지가 쓰인 1586년보다 훨씬 더 늦었다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미 16세기에
한문으로는 드러내기 힘든 우리 감정의 세세한 숨결을
한글의 풍부한 표현력을 빌어, 광범위하게 표현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된 거다.
이 편지는 지금까지 발굴되고 확인된 것들 중에서 최초 일뿐이지,
그 만한 편지가 쓰이려면 훨씬 전부터, 한글이 광범위하게 쓰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글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나, 6개 국어 능통했다는, 젊은 천재 신숙주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 아닌,
거의 세종대왕 혼자의 힘으로 창제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6세기에 우리의 선조였던 한 여인이 남긴 짧은 한 편의 글에서,
새삼 우리 글에 대한 고마움도,
그 글을 창제하신 위대한 왕에 대한 존경심도,
메말랐던 삭막한 가슴에 먹먹한 가을의 그리움까지
덜컥 들어와 버렸다.
<1998년 안동에서 발견된, 원이 어머니의 순 한글 편지 원문. 안동 박물관 소장 >
병술(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 이 글은 10년 전 한글날 2010년 10월 9일, 필자가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썼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