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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수상한 가을이 가고 있다.

-함께 저녁을 먹어줄 친구들이 사는, 평창동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by 이안

가을이다.

가을은 언제나 버텨내기 힘들다.


특히 서울의 가을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여의도 아침 출근길마다 높고 푸르던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고,

길가의 가로수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찌릿하도록 빨강과 노랑이 만드는 나무의 가을 옷들이 예뻤다.

이맘때면 늘 광화문과 경복궁에 들러, 샛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발목에까지 차오르도록 쌓인 길을 걸었는데,

란 하늘과 노란 은행나무잎의 길들이 너무나 마음을 벅차게 했었다.


제주도에서 올봄부터 살다 보니 , 봄과 여름 두 계절은 무리 없이 보냈지만, 제주의 가을은 낯설다. 서울의 가을 하늘처럼 제주의 하늘도 파랗게 물들어 예뻤지만, 제주도의 숲과 나무들은 여전히 초록 잎으로 푸름이 가득하다. 은행나무가 제주도에서는 잘 안 자라는 건지, 서울처럼 은행나무 잎이 가득 쌓인 거리도 보지 못했다.

아침저녁마다 부는 쌀쌀한 바람에, ‘아 이제 가을이구나’하는 설레는 마음을 갖기에는 충분했지만, 서울에서보다는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가을을 타는 중이다. 서울의 가을이, 한 번에 훅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와서, 퍼렇게 멍이 들도록 시린 상처를 남겼다면, 제주의 가을은 천천히 나를 고문하는 느낌이다.


<제주도 가을의 억새 밭 >


차라리 훅 들어와서 한 2~3주 앓게 만들면 버티겠는데, 은근히 들어와서 뭉근하게 자리 잡고는 한 달째 떠나지 않고 있으니, 가을이 미치도록 지겨워서 죽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런 고문 같은 제주의 미지근한 가을은, 12월 초까지, 앞으로 2달은 더 이어질 거 같다.


제주의 가을이 그렇게 시작했던 것처럼, 제주의 겨울도 갑자기 기온을 영하로 뚝 떨어뜨리면서, 찾아올 거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라보는 눈이 파랗게 물들 거 같은 가을 하늘 아래에 우뚝 서있는 한라산의 위용은 분명히 달라졌다.

여름보다 더 선명하고 높이 우뚝 솟아 있고, 짧지만 강렬한 석양의 오렌지 빛이 더 찬란해졌기 때문에, 찐 노랑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한라산의 푸른 자태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대로 제주에서의 가을을 두 달이나 더 버틸 자신이 없어서,
이대로 버티다가는 내 눈물샘도,
가슴속 외로움도 다 바닥날 정도로 가을에 지쳐갈 거 같아서,

다시 서울로 이사를 가야겠다,
울릉도의 나무로 만든 적산가옥이 있는, 교동으로 집을 옮기겠다,
러시아나 모로코로 이민을 가겠다며,
서울 친구들에게 걱정만 안겨주며 설레발을 치고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실행에 옮긴 것은 없다.


9월 중순부터 지금까지의 미적지근한 가을은 어찌어찌 버텨냈지만,

10월 중순을 넘겨서까지 가을을 버텨낼 자신은 없어서, 4가지 옵션으로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해봤다.


1. 고양이를 한 마리 더 입양할까요?
2. 댕댕이를 입양할까요?
3. 낚시를 시작해 볼까요?
4. 표선성당에 다닐까요?


여러 지인들께 의견을 구했지만, 뚜렷한 해결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댕댕이를 입양하는 건 다수가 반대다.

왜냐하면 지금 있는 냥이 키키가 힘들어질 테니까. 나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 오랜 세월 절친이었던 탤런트이자 방송인 김원희 씨는, 반려동물들이 채워줄 수 없는 외로움이 분명히 있을 거라면서, 표선 성당에 다니는 걸 추천했다. 원희 씨는 내가 이혼을 하고 제주도에 혼자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해주는 오랜 벗이다. 본인이 교회에 다니고 하느님을 믿으면서, 많은 위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에, 나도 하느님을 믿어볼 것을 여러 번 권하기도 했었다.


지인들에게 내가 선택지를 줘놓고선, 결과적으로 내가 만든 선택지들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냥이도, 댕댕이도, 낚시도, 표선 성당도 다 포기했다.

그리고 제주섬에서 탈출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제주도 가을날의 한라산 >


인천에 사는 대학 친구 창우는, 송도나 영종도로 이사를 오란다.

주말마다, 차이나타운에서 -> 막걸리 안주로 삼치구이가 맛있는 [인하의 집] -> 그리고 30년 역사의 분식 골목에서 칼국수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아침엔 해장국집 맛집 투어를 하자고 한다.

서울 신한은행에서 본부장으로 있는 절친은, 자녀들도 다 크다 보니, 매일 저녁을 혼자 먹고 있다면서, 피터팬 PD가 평창동으로 이사 오면, 매일 저녁을 같이 먹어주겠단다. 단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끝도 없는 영업 회식이 시작될 테니, 저녁마다 날 보기는 어려울 거라며.




견뎌내기 힘든 제주의 가을이, 감나무의 홍시처럼 서서히 익어 가고 있다.

지난 7개월간 아무렇지도 않게, 씩씩하게 혼자 매일 먹던 3끼 식사도, 이젠 더 이상은 못 먹을 거 같고,

제주에 지인이 없다 보니, 하루 종일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던 날들도,

가을이 되자 견딜 자신이 없어지고 있다.


평창동으로 이사를 가야 할까? 시세를 보니 작은 다세대 주택이 6천에 월세 60만 원이라고 한다.

이미 2억 부채가 있는데, 전세자금으로 6천만 원을 더 빌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북한산의 북악 스카이웨이가 감아도는, 평창동의 가을은 아름다울까?

예전의 나처럼, 서울의 가을을 다시 견뎌낼 수 있을까?


<이혼하기 전에 이 아름다운 가을산을, 초5 막내아들과 함께 올랐었다. 올해도 서울의 북한산은 아름다울 것이다. 사진 : 2017년 북한산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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