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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팡 Dec 11. 2020

쓰임새;

나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 했다.

어떤 사물이 그 기능 올바르게 하여 필요를 충족할 때 우리는 쓰임새 있다고 한다.


기능과 필요는 어떤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 잣대이다. 아름다운 것도 기능의 일종이라고 보자. 이 세상에는 잘 다듬어진 모양새 하나로도 존재의 의미가 충분한 사물들이 차고 넘친다. 꼭두새벽부터 주인들을 줄 세우며 몸값을 올린다.


편리함이든, 심미성이든, 가심비든 그 사물이 가진 능력은 자연의 순리처럼 '필요라는 중력 gravity'의 영향아래 놓이게 된다. '필요의 중력'이 당기지 않는 사물은 하릴없이 허공을 떠다닌다. 어디에도 서 있지 못하고 기대지 못하고 보관되지 못한다.


필요가 없으면 중력을 잃게 되고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무중력 속에 놓인 사물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오히려 평온하다. 그러다 그 평행선 같은 관계가 깨지는 날이 온다. 사물이 떠도는 궤도와 우리 삶의 공전이 만나는 순간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칠흑 바탕에 꼬리를 길게 내 뺀 유성처럼 그 사물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인다. 그쯤 우리는 짧게 한번 놀라고(이게 뭐지? 언제 샀지? 누구거야?) 그다음 눈을 오므려 뜨며 그것의 쓰임새에 이름을 붙이려 애를 쓴다.

발견하고 10초도 안되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며 혼잣말이 튀어나와 버리면 그 사물은 당근마켓이란 포털을 타고 다른 은하계로 떠나거나 쓰레기통이라는 블랙홀로 존재를 감춘다. 재활용이라는 윤회의 길을 걷기도 하고.


성질(능력) + 중력(필요) = 쓰임의 완성



사람도 그렇다.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이 없다면 마땅한 중력을 얻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게 된다. 내가 걸을 때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도, 나의 언어들이 공중에 전부 흩어지지 않고 일부나마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나에게 작용된 중력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중력을 얻기 위해 대기권에 몸을 태워 빛을 낸다. 그마저도 대기권에 들어설 수 없다면 나 자신을 힘껏 태울 기회 조차 없다. 빗나가면 궤도를 수정해야 하고 그러기를 몇 번,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어렵사리 세상이란 중력의 영향 아래 놓이면 이제는 마땅히 중력 속에 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한다. 혹시 중심을 잃어 발이 떨어질까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쓰임새 있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신이 필요한 존재이길 바란다. 언제까지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의 중력을 감당하며 살고자 한다. 어제는 머리와 어깨가 무겁고 오늘은 마음이 헛헛하여 가벼히 흔들리는 것도 중력 속에 살며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그 중력 때문에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중력이 또 있어야 바닥을 짚고 일어 설 수도 있으며  뛰어올라 링을 내려 칠 수도 있다.


코로나로 잃어버린 중력


이 글을 쓰는 동안 코로나로 인해 중력을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코트를 잃은 중학교 농구 선생님의 사연을 보며 그분의 마음이 어떨지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에게도 직장 동료가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가족이 그랬다. 한 번도 중력을 잃어 본 적이 없는 그들은 불안과 상심의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 다시는 세상의 중력을 얻지 못할까 손톱을 깨무는 어릴적 습관이 보인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앗아간 중력이 회복되어 일상의 중심이 다시 세워지길 바라며 우리는 쓸모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쓰이지 않는 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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