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단상
AI가 회계사도, 개발자도 대체하는 시대. 진짜 위기는 '내 일자리'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키우는 통로'가 사라지는 것이다. 직업이 옅어질수록 개인의 무늬로 버텨야 한다. 명리학은 그 무늬를 읽는 언어다.
지인은 요즘 제미나이와 챗gpt로 업무를 하는데, 자신보다 서무처리 작업을 기대보다 잘해서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이러다가 인간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 같다고 불안해했다. 기계적인 단순반복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영역에서, 창의적인 분야에서의 AI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엄청난 처리속도를 자랑하는 챗gpt조차 매우 비싼 모델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대화내용을 저장해주지 않는다. 챗gpt는 유로모드일 경우 128K의 토큰 내의 정보를 참고해서 답변하고 그 이전의 글은 요약화해 두고 글의 접근성에서 제외시킨다.
체스나 바둑처럼 경우의 수가 무한해 보이는 영역도, AI는 국면을 제한하고 최적해를 찾아내듯 일의 효율을 집요하게 최적화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이미 숫자와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보도에 따르면 작년 1월에는 순위에 들지 못했던 현대차가 올해 1월에는 3,448억 원으로 월간 매수 규모 3위에 올랐고, 올해 초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공개 이후 ‘피지컬 AI’ 주도주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주가도 전일 대비 2.25% 오른 50만 5,000원으로 장을 마감했고, 올해 들어 69% 이상 상승했다는 설명이 붙는다. 인간이 기피하는 일—화장실 청소 같은 노동, 장기간 반복되는 업무—을 로봇이 더 낮은 비용으로 대체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CES에서 빨래를 개는 로봇이 느리게 움직이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느린 건 기술의 ‘의지’가 아니라 ‘단계’다. 효율은 결국 더 빨라질 것이고, 많은 일은 로봇에게 넘어갈 것이다.
국내도 AI발 고용한파의 영향권이라는 기사들이 나온다. 지난해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 중 600명이 실무 수습기관을 배정받지 못했을 정도라는 보도는 상징적이다. 전문직일수록 인건비 부담이 크기에 오히려 더 빠르게 대체되고, 프로그래밍 업계에서도 신입 채용을 뽑지 않는 추세이다. 시니어는 경험으로 버텨가겠지만, 더 불편한 변화는 따로 있다. 인간이 인간을 훈련시켜 전문가로 만드는 ‘통로’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결국 많은 직장인은 ‘내 업무가 대체 가능한가’를 계산하며 버티게 되고, 그 계산이 일상이 되는 순간 직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린다. “나 여기 소속이야”라는 말이, 점점 얇아진다.
일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이제 자신의 취향으로 시간을 채워야 하는 시대가 온다. 정년이 지나고 나면 가장 힘든 것이 “할 일이 없어서”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사회적 연결고리가 옅어지면, 남들이 나를 찾는 이유를 만들지 못하는 순간 혼자 시간을 감당해야 한다. 직업이라는 이름이 사라질수록 개인의 매력으로 버텨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현재형으로 말하고 싶다. 이미 우리는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시간을 쓰고 무엇을 남기느냐’가 사람을 설명하기 시작한 시대에 들어와 있다. 나라면 그 시간을 ‘독서’와 ‘야구’로 채울 것이다. 읽고, 기록하고, 경기의 리듬을 따라가며 내 리듬도 같이 조율하는 방식으로.
여기서 명리학의 자리가 생긴다. 명리학을 배우면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상대를 거울로 삼아 자신을 더 깊게 바라볼 수 있다. 데이터로 환원 가능한 분석은 AI가 더 잘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무늬—관계, 기질, 선택의 망설임—는 인간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명리학은 인간의 삶의 리듬을 읽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그 결과는 꽤 실용적이다. 타인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자책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소소한 변수의 일상에 화가 덜 나게 된다. 내일 주가를 AI가 예측할 수는 있어도 정확히 맞출 수 없듯, 명리학도 운명을 ‘맞추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흐름을 ‘읽어내는 언어’에 가깝다. 위로와 통제는 다르다. 누군가를 붙잡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와 너의 리듬을 더 정직하게 알아차리기 위한 말—그게 내가 이 시대에 명리학을 글로 남기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