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 억지력의 붕괴와 스스로 내려온 경찰의 자리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강하다. 로마, 영국, 소련의 몰락과 미국 이란 작전이 보여준 억지력의 본질. 남의 칼집을 믿는 나라가 맞이하는 결말과 한국이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이유.
칼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다. 억지력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상대가 '저 나라를 건드리면 감당이 안 된다'라고 믿는 순간,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칼집 속의 칼은 소모되지 않는다. 닳지도, 녹슬지도 않는다. 그러나 꺼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억지력이 아니다. 그냥 싸움이다. 역사 속 제국들은 예외 없이 이 단순한 진실을 잊는 순간 기울기 시작했다. 로마는 전성기에 칼을 거의 꺼내지 않았다. 국경 너머의 적들은 로마 군단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변방의 위협이 늘어나자 로마는 끊임없이 칼을 꺼내 들었다. 용병을 고용했고, 전선을 확대했다. 재정은 고갈됐고 내부 결속은 무너졌다. 결국 로마를 무너뜨린 건 외적이 아니라 칼을 너무 많이 꺼낸 로마 자신이었다.
영국 제국의 해체는 더 교훈적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은 칼을 완전히 꺼내 들었다. 이겼다. 그러나 이긴 대가로 제국은 끝났다. 인도를 잃었고, 중동을 잃었고, 기축통화 자리를 미국에 넘겼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패권을 잃은 역사상 가장 선명한 사례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도 마찬가지였다. 위성국 이탈을 막으려 칼을 꺼냈고, 10년을 싸웠고, 이기지 못했다. 전 세계는 그 장면을 지켜봤다. '소련도 못 이기는 싸움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억지력은 사실상 끝났다. 칼집의 무게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측정됐다.
이번 미국의 이란 군사작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미국 전쟁권한법상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군사작전은 최대 60일, 철수 기간 30일이다. 그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인구 8,500만의 신정국가는 쓰러지지 않았다. 전 세계가 이 장면을 생중계로 봤다. 중요한 건 군사적 승패가 아니다. '미국이 움직이면 끝난다'는 그 믿음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무역 운송로의 경찰이었다. 그 자리는 군사력이 아니라 동맹국들과의 신뢰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동맹에게 방위비를 요구하면서 관세를 부과하고, 자국 이익의 이름으로 동맹의 이익을 무시한다. 신뢰는 한 번 부서지면 복원에 수십 년이 걸린다. 스스로 경찰 배지를 내려놓는 나라를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질문이 낯설지 않다. 명나라를 섬겼고, 일본에 기댔고, 미국을 의지했다. 친명파, 친일파, 친미파, 친중파. 이름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같다. 강한 나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숙명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그 숙명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미뤄온 결과였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아이들이고, 여성이고, 노인이다.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아무리 비싸도 전쟁보다 싸다. 남의 칼집을 믿는 나라는 그 칼이 녹슬기 시작하는 날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