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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ug 13. 2016

감자탕집에서

2016.8.12.



나는 무엇이 먹고 싶은가?


포카칩을 안주삼아 맥주를 들이킬 때였을거다. 갑자기 속이 너무 느끼해졌다.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해달라고 졸랐던 비엔나 소시지를 저녁 반찬으로 먹어서인지도 모른다. 작은 컵라면 국물을 홀짝홀짝 다 마셨지만 영혼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내 혀끝은 뭔가에 무척 목말라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12시가 다 돼가던 그 밤에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 자못 심각하게 내가 알고 있는 음식의 맛을 떠올렸다. 칼칼하고 매운 음식이지만 느끼하지 않은 뭔가가. 그러니까 그게... 쩝.


' 김치? 에이 너무 셔. 국물이 먹고 싶은데.

그러면 국물 떡볶이? 그건 달아.

보다 좀 더 꾸밈이 없는 담백하고 칼칼한 맛이 필요한데.

흠... 추어탕? 얼마 전 미꾸라지 놓아주고는 안 당겨.

아... 뭐지?  

육개장? 육개장은 너무 기름이 둥둥이라 느끼한데."


미간에 살짝 인상을 쓰고 온 몸의 세포를 끌어모아 집중했다. TV를 보다가 '와 저거 먹고 싶다' 할 때나 옆에 앉은 동료가 어제 먹은 국물 떡볶이집이 괜찮았다고 할 때는 쉬운 경우다. 문제는 이렇게 깔깔해진 입속의 느낌과 니글거리는 배를 달래줄 메뉴를 찾는 것은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참을성 있게 메뉴를 떠올려가며 그 맛을 떠올리고 정말 맛있게 먹을 기분이 드는지를 혼자 상상해봐야 하니까.


그리고 빙고. 십여분 만에 나는 이거다 싶었다. 느끼하지 않으면서 진한 빨간 육수. 그건 바로 '감자탕'이었다. 그 국물을 꿀꺽 들이키면 과자 기름이 덕지덕지 붙은 내 속을 사악~ 쓸어내려줄 것 같았다. 따끈하고 칼칼한 벌건 감자탕 국물이 정답이었다. 당장 가서 먹고 싶었는데 아직 어린아이들과 같이 외식을 할 수 있는 메뉴가 아니라 참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감자탕에 대한 열망은 더 타올랐다. 처음엔 그냥 느끼함을 달래줄 개운한 국물이 필요했던 건데 어찌 된 게 이젠 어떤 일념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그래서 감자탕 집으로 갔다


그리고 기회는 왔다. 오래간만에 시댁에 아이들을 맡기게 된 것. Today is the day.('덱스터'가 항상 계획을 실행하며 했던 말) 오늘이 그날이었다. 큰 항아리에 양도 푸짐하다며 지인이 추천한 그 집에 들어서자 남은 테이블이 몇 개 없었다. 여기저기서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큼지막한 뚝배기가 보인다. '제대로 찾아왔다'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발을 벗으며 냄새를 들이켰다. 습한 매운 향에 구수한 고기 냄새가 실렸다. 침이 양쪽 볼안으로 제대로 고였다. 이거 굉장한 저녁이 되겠군. 본능적인 흥겨움에 젖어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앉은자리는 두 개의 테이블이 붙어있는 것 중 한 개의 테이블이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옆에 앉자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나는 신랑이 다니는 미용실 원장님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안경 쓴 얼굴에 마른 체구가 왠지 구부정해 보였다. (스마트 폰에 너무 열중해 있어서 일까)


잠깐 자리를 비웠던 일행이 그 여자 맞은편으로 앉았다. 남자였다. 비슷한 나이 때로 보였다. 남자는 감자탕집에 오래간만에 와본다는 말을 하며 여자 쪽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쪽 감자탕은 아직 끓기 직전이었는데 이미 소주는 시작했나 보다. 여자가 말을 시작했는데 무척 하이톤에 음성이 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귀에 쏙쏙 들어왔다. 반대로 내 목소리는 원래 작아서 시끄러운 곳에서는 대화를 하려는 의지 바로 꺾여버리곤 하는데, 오늘도 그러했다.  특히나 '여자여자'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조잘조잘거리니 애초에 말할 전의를 상실해버렸다고나 할까. 감자탕이나 묵묵히 먹어야겠다 싶었다.



옆자리 커플 이야기가 자꾸 들린다


옆 테이블의 여자는 쉴 새 없이 많이 했다. 저러니까 저렇게 살이 안 찌지. 나도 말 많이 하는데 왜 찌지. 이런 사소한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그 여자의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를 엿들으며 먹는 꼴이 되고 말았다. 워낙 바로 옆 테이블이라 나는 조심스럽게 무관심한 척했지만 사실 내 돼지뼈에 살을 발라내는 내내 내 귀는 옆 테이블 쪽에 열려있었다. 고추냉이 간장에 살코기를 찍어 입에 넣을 때에도, 국물을 마시고 감자를 뚝뚝 잘라서 국물에 적셔 먹을 때에도, 깍두기를 입에 넣고 서걱서걱 씹을 때에도 나는 다 듣고 있었다. (어쩐지 나 자신이 오싹하게 느껴진다)


여자와 남자는 둘의 함께 아는 한 인물의 근황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여자는 남자의 학창 시절을 물어봤다. 공부하기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학생이었는지 덧붙이면서. 남자가 자신의 수능 결과에 살짝 자조석인 대답하자, 여자는 '그만하면 성공한 거'라며 위로가 섞인 칭찬을 건넸다. (음. 여자가 남자에게 꽤 호의적이군) 남자는 그냥 피식 웃어가며 대답만 하는 듯했다.(바로 옆 테이블이라 똑바로 볼 수 없어 청각에 모든 정황을 유추해야 함) 남자는 회사의 회식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했고, 여자는 이사할 계획을 접었다고 한다. 차라리 그 돈을 좀 세이브했다가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여행을 훌쩍 떠나고 싶다 했다. (좋겠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어서) 남자의 '한 병 더?' 말에 더 마시면 내일 맛이 간다며 살짝 사양했다. (여자가 술이 좀 약한가 보군) 여자는 정말 쉴 틈 없이 말했다.


내가 여자라 안다. 여자는 분명 남자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자가 말하는 억양과 말투에 그리고 간간히 섞인 웃음에는 분명 '나 너에게 여자이고 싶어' 느낌이 묻어났다. 하지만 남자 쪽은 워낙 말수가 적어 좀처럼 파악이 안 되었다. 남자 얼굴이라도 좀 유심히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너무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옆 테이블 쪽은 그냥 맨 벽이라 그쪽을 쳐다볼 핑계도 없다. 아무튼 대화의 분위기나 옆에서 솔솔 불어오는 핑크빛 공기는 여자 쪽에서 좀 더 뿜어 나오고 있었다. (왕년에 sbs 짝짓기 프로그램 '짝'을 무척 즐겨보던 아줌마입니다만, 흠흠)



그 옆에 우리 부부는


이렇게 뭔가 '불타는 금요일'스러운 커플 옆에 바로 우리 부부가 있었다. 뚝배기에 걸쭉한 국물만 남았을 무렵까지 나와 신랑은 참으로 묵묵히 먹기만 했다. 내가 기억하는 신랑과의 대화라고는


"(후루룩) 오빠 뜨거운 김이 자꾸 나한테만 와. 얼굴 뜨거워"


"그럼,(쩝쩝) 나랑 자리 바꿀까?"


"됐어.(우적우적) 귀찮아. 먹자"


"그래.(후루룩)"


가 전부였다. 그리고 먹는 내내 '여기 괜찮은데?", '이거야, 국물', '캬하. 완전 만족이야' 과 같은 일방적인 나의 감탄사가 아주 조금 있었을 뿐이다. 중간에 '여보, 우리 오늘 밤에 뭐할까 애들도 없는데'하고 물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쩐지 옆 테이블 여자의 기에 잔뜩 눌리기도 했고, 대화를 엿듣느라 그냥 조용히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신랑은 정말 말이 없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어색하게 앉아서 처음 식사를 같이할 때에도 내가 계속 말을 했다. 혈액형이 뭔지 서로 묻고 그 혈액형 특성에 자신의 성격이 들어맞는지, 커피는 좋아하는지, 아주 시시콜콜한 대화를 간신히 이어나갔다. 진땀 빼는 남자가 안 쓰러워 편하게 해주고 싶어 말을 더 많이 하고 자주 웃어줬다. 그래 나도 그랬구나. 배가 많이 불렀다. 더 이상은 못 먹을 지경이 돼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을까?


  여전히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쉼 없이 들리고 남자의 대답이 들린다. 나도 그 옛날 저 여자같이 보였으려나. 물을 마시며 피식 웃음이 나았다. 그리고 슬쩍 눈동자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제스처에서 알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접힌 남자의 오른쪽 팔에는 그의 몸의 무게가 잔뜩 실려있었다. 얼굴은 감자탕의 뜨거운 김을 다 쐴정도로 가까이 앞쪽으로 가 있었다. 남자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너의 말을 듣는 게 좋다'라고...


신랑은 배를 두들이며 스마트폰을 하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나도 다 먹었으니 이만 가자고 했다. 앞치마를 벗으며 온몸에 붙은 옆 테이블의 핑크빛 공기도 탈탈 털었다. 여자의 목소리로, 남자의 몸짓으로 쉴 새 없이 썸을 속삭이는 그 둘의 모습에 우리 연애시절이 떠올랐다.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고 또 확인하기 위해 나누었던 그 설레는 과정들. 떨리고 두근거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기보다는. 연애시절 기억 속의 신랑과 나를 떠올리면 참 풋풋했다. 어쩜 그렇게 서로 좋았을까. 그때 생각을 잠시 하니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몇 마디 나누면서 서로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등뼈에 살을 열심히 발라내는 사이도. 참 정겹고 부부 같지 아니한가.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감자탕을 먹으면서 관심 있는 남자에게 한마디라도 상큼하게 건내야 한다면 아무래도 오늘만큼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을 테니까.


우리가 나갈 때 즈음, 여자가 식당 아줌마를 불렀다.


"아줌마, 우리 공깃밥 하나랑, 소주 한 병 더요"


아까 여자가 더 이상은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이 둘은 확실한 불금을 보낼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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