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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ug 18. 2016

사이좋은 양 가족

2016.8.17.


항상 그런 건 아니고, 가끔 내가 하는 말이 먹힐 때가 있다.


어릴 적 엄마와 아빠가 부부싸움을 하던 날이었다. 보통은 험악한 분위기에 동생들과 방안에 대피해있곤 했는데 그날은 뭔가 홀렸나 보다. 방안에서 듣자 하니 아빠가 엄마한테 너무 말을 심하게 했다. (적어도 어릴 적 내 기준에는) 평소 엄하신 아빠한테 찍소리도 못하던 내가 아빠한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엄마한테 그렇게 심한 말하면, 녹음해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아빠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지는 듯하더니 금세 힘이 풀렸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찌 그런 당돌한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말은 정말 먹혔다. 그 이후로 아빠가 (적어도) 우리 앞에서 엄마한테 나쁜 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쓰고 보니 내 말이 대단했다기보다는, 딸의 그 말을 듣고 바로 행동 수정한 우리 아빠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오늘 내 말이 먹힌 날이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누구한테 먹혔는지 다들 몹시 궁금하시겠지만 사소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장황하고 대단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런 일련의 작업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인내심을 조금만 더 충전해주시길) 나는 아침부터 무척 시무룩해졌었다. 왜냐하면 여름휴가철이 슬슬 마무리되나 싶으니 신랑의 스터디 스케줄이 조금씩 다시 잡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내일은 신랑이 12시 넘어야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어깨가 축 늘어진다. 나도 안다. 주말 부부나 아니면 신랑을 이라크나 사우디로 장기간으로 보낸 엄마들이 보면 상당히 코웃음을 칠 처사라는 것을. 하지만 난 정말 신랑이 없을 때 육아가 힘들다. 그렇다고 신랑이 아이들이랑 엄청나게 잘 놀아주는 것도 아니다. 신랑의 육아 동참률로 말할 것 같으면 덴마크나 스웨덴까지는 아니고 싱가폴정도 된다. 그래도 선풍기를 강풍에서 약풍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할 만한 누군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육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빠가 없으면 아이들이 좀 더 티격태격거린다. 나보다 확실히 조금 엄한 구석이 있는 아빠가 없으니 당연하다.


낚시 놀이를 혼자만 하겠다는 동생과 자기도 한번 해보겠다며 빼앗으려는 오빠.

'엄마 아빠 놀이'를 하자는 여동생과 '악어 대결' 놀이를 하자는 오빠.

'오빠가 나한테 나쁜 말 했어'라고 엄마한테 고자질하는 동생에게 '내가 언제!'라고 고함을 치는 오빠.


대충 생각나는 건 이렇고 더 많았는데 씻으러 들어왔을 때 갈등은 절정에 달았다. 둘 다 씻기고 '너희가 물기 좀 닦아봐'하고 수건을 하나씩 쥐어줬다. 대충 닦는 것 같더니 아들이 말했다


"엄마 등은 어떻게 닦아?"

"응, 진이가 닦아주면 좋겠네. 진아, 오빠 등좀 닦아줘"


그러자 둘째가 수건을 쫙 펼쳐 오빠 등에 걸치고 두드렸다. 그러자 오빠가 발끈하며 말했다.


"야! 그게 아냐. 뭐 하는 거야. 수건을 잡고 톡톡톡 두들이며 닦으라고"


씻는 동안도 샤워기 갖고 한바탕 싸운 후라 그냥 뭘 해도 동생이 마음에 안 들었을 상황이었다. 그냥 두면 또 다툴 것 같아 내가 나섰다.


"그럼 오빠가 이제 동생 닦아줘. 그럼 네가 잘 해봐"


그러자 아들은 바로 싫은 기색을 비추며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나도 지칠 대로 지쳐서 화를 낼 에너지도 없었는데 갑자기 예전에 어디서 읽었던 짧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샤워기에 물을 멈추고 홀딱 벗은 상태로 화장실 문 앞에 서있는 아이들에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너희 혹시 이 이야기 알아? 옛날에 사이가 좋은 양 가족이 살았대. 그리고 그 옆집엔 서로 미워하고 싸우기만 하는 가족도 살았대. 근데 엄청 추운 겨울이 온 거야. 사이좋은 양 가족은 '우리 서로서로 꼭 안고 있자. 그럼 좀 더 따뜻하니까 좋아'라고 하며 서로 사랑스럽게 안고 추위를 견뎠대. 그런데 그 옆집에 맨날 싸우는 양 가족은 '내가 제 옆에 있으면 저 녀석이 따뜻해지겠지? 흥, 난 싫어. 그냥 혼자 있을래' 하고 추워도 따로 각자 있었대. 그리고 추위가 지나고 화목한 가족이 옆집에 가보니까 그 사이 나쁜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너무 추워서 다들 털까지 얼어서 덜덜덜 떨며 독감에 걸렸다지 뭐야. 자 그럼. 너희는 어떤 가족이 될 거야?"


'추운 겨울이 온 거야'라고 말할 때 이미 난 알았다. 얘들 눈빛에 화목한 양 가족, 싸우는 양 가족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래서 더 신이 나서 살을 붙여서 대화체도 넣어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녀석들은 무척이나 집중해서 들었다. 이야기를 다 마쳤을 무렵엔 두 녀석들은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잔소리를 하지만 이렇게 하나가 제대로 먹힐 때가 있다. 그러면 내가 어쩌면 좋은 엄마일지 모른다는 최면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보통 애들 혼내키다 보면 '내가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닐까?' 상태가 예사임)


잔뜩 감화받은 녀석들은 서로 열심히 몸을 닦아주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애들이 잠잠해진 듯해 머리도 감고 물도 시원하게 더 끼얹으며 여유를 부렸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가며 밖으로 나가려니 방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머리 말리나 보네.

요즘 큰애가 혼자 머리를 말리곤 한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갑자기 엄마를 도와준다며 설거지를 했다.





너희를 '사이좋은 양 가족'으로 인정한다.

현아, 진아.

격하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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