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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Nov 04. 2016

어릴 적, 애증의 TV

2016.11.3.



집이라는 '작은 성'

밤 하늘 아래 차창 밖 풍경. 아파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이 보인다.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켜져있는 거실의 전등의 갯수만큼 아마 전혀 다른 '세계'가 각각 존재할거다. 어느 육아서에서 '아이에게 엄마의 기분은 집안의 날씨' 라고 했던 것처럼, 각기 다른 부모의 성격만큼 가정은 저마다 독특한 색을 갖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기소개에 쓰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라는 말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특히 친구들과 어린시절 이야기를 공유하다보면,

우리가 각자 집이라는 '작은 성'에서 살아왔음을 실감한다.


"혼날 때 엄마한테 싸대기는 가끔 맞는거 아니야?"하고 말해 친구들을 놀래킨 미모의 소유자 K양.

"넌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잘못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란 딸딸딸 집안의 셋째딸 L양.

"1등 못하고 아래에서 머리 수나 채울 꺼면 나가 죽어라" 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Y군.


나에게도 친구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사연이 있긴 있었다.

이말을 하면 친구들은 매번 '너네 아빠 대단하시다'라는 감탄사를 자아내곤 했으니 말이다.



어릴적 애증의 TV


 

이름하야 '애증의 TV'.

 

나의 어릴 적 '작은 성'에서는  TV를 보려면 허락을 받아야했다. 가장 곤욕스러웠던 것은, 부모님께서 외출 했을 때였다. 동생 둘과 집을 보다보면 티비에서 뭘 할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아빠는 절대 보지 말것을 엄명을 내렸다. 당시 무척 엄했던 아버지의 말은 하늘과 같아, 혹시라도 몰래 켜서 보고 있노라면 불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특히 재미있게 보는 와중에 현관문을 따는 소리가 들리면 모두들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가장 큰 누나이자 언니였던 내가 리모컨을 담당했다. 엄지 손가락을 리모컨 전원 버튼에 올려놓고 긴장의 태세를 갖췄다. 한쪽 귀를 현관 밖 엘레베이터 소리에 열어놓고, 엘레베이터 '땡' 소리가 조금 크게 들리기라도 하면 일단 전원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그러면 우리 셋은 튀어오르듯 일어나 준비를 한다. 부모님이 귀가하시것이 아니라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티비를 켰다. 이런 쫄밋한 과정을 한 네 다섯번 반복하면 진짜 현관에 열쇠를 꼽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다다다 뛰어들어갔다. 스탠드가 밝혀진 책상에 앉아 미리 펼쳐놓은 문제집 위의 펜을 잡고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방문을 열 때까지 시치미를 떼며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일단 연기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을 우리들에게서 아빠는 진작에 냄새를 맡으셨다. 녀석들이 외출했을 때 티비를 몰래 보는 것 같은데 안봤다고 하니 아빠 입장에서는 물증이 필요했다. 그 때부터 아빠와 우리 세남매의 스릴넘치는 치밀한 두뇌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 덜미가 잡힌 것은 이랬다. 여느 때처럼 부모님의 귀가 직후 각자의 위치에서 공부하던 척을 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거실에서 우리를 불렀다.


"너네 공부안하고 티비봤지?"


"네? 아니요. 저희 계속 방에 있었는데요"


"하, 녀석들이 거짓말하고 있네, 아빠가 나갈 때 분명히 7번이었는데 지금 10번으로 틀어져있잖아"


 티비를 끄기전 채널 번호를 미리 기억하고 외출하신 아버지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꼼짝없이 혼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티비를 몰래 켰을 때의 채널 번호을 기억했다 맞춰 끄곤했다.


하지만 아빠는 더 지능적으로 우리의 헛점을 찾아 나갔다. 채널 번호에 이어 아빠는 리모컨의 위치를 보고 나가셨던 것이다. 눈치가 제법 빨라진 우리는 사이좋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채널 번호를, 남동생은 리모컨이 놓여져 있던 위치, 여동생은 리모컨을 쥐고 재빨리 담당을 맡았다. 이런 눈물겨운 협동심에 불타는 작전을 수행하며 형제애도 왠지 끈끈해졌다. 우리의 팀웍이 가장 빛났을 때는 바로 번갈아 가며 망을 볼 때였다. 아파트 주차장이 보이는 창문을 열고 한명씩 보초(?)를 섰는데, 주차를 하고 내리는 부모님을 보고 준비를 하면 좀 여유롭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과 벌이는 대결이 거의 뻔하듯이 아빠는 항상 한발 앞서 나갔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단서를 찾아 나름 순진했던 우리의 진땀을 빼놓곤 했다. 그날은 정말 모든게 완벽했었다. 채널 번호, 리모컨의 위치, 재빨리 방에 뛰어들어간 타이밍도 흠잡을 때가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큰 목소리를 우리를 거실로 소환했다.


"허허, 얘네들 또 티비봤네"


"(시치미 떼며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저희 안 봤는데요 정말"


"요 녀석들, 누굴 속이냐?"


아빠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TV 뒷통수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말했다.


"아주 뜨끈뜨끈하구만. 너 네 다 손들고 서있어"


  아뿔사. TV를 오래 틀면 뜨끈해진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알기엔 우리는 너무 어렸다. 영락없이 벌을 서고 비통한 심정이 되었던 나는 그 다음 기회엔 그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 부모님이 외출하신 토요일 우리는 저녁에 하는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부모님 귀가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껐다. 티비가 너무 과열되면 안되기 때문에 적당히 보고 미리 끄고 식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마음이 안 놓여 얼음주머니에 수건을 감싸서 티비를 좀 식혔다.


그날 하필 예상보다  부모님이 좀 빨리 오셨고,

나는 이내 얼음 주머니를 이용한 방법이 실수였음을 깨달게 되었다.

티비에 손을 올려놓고 검열을 마친 아빠가 말했다.


"어쭈, 이것들이. 얼음이라도 올려놨냐? 여기만 차갑네."




모든 셋팅이 완벽했던 그 날
 배신과 치욕의 순간


 우리의 행동거지를 손바닥 보듯 다 읽는 아빠가 야속했지만, 지금 내가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니 아빠 입장에서는 어려울 것도 아니었을 것 같다. (애들은 표정에서 다 나온다) 그래도 그날은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 몰래 티비를 보고 끈 날이었다.  당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무척 유명했는데, 그날 부모님이 저녁 모임이라 우리는 핫한 드라마를 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홀딱 빠져 보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처리하고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티비 채널도, 리모컨 위치도, 티비의 온도도 더 이상 흠 잡을 게 없었다. 집에 돌아오신 아빠는 뭔가 낌새를 채신 모양이다.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황.  아빠는 거실로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아빠의 손에는 예상치 못한 회초리가 들려있었다.(회초리를 정말 잘못했을 때만 나오곤 했다)


"너네, 솔직히 말해봐.티비 봤지?"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회초리 끝으로 내 배를 살짝 누르며 다시 말을 이으셨다.


"니가 첫째니까, 말해봐라. 티비 봤어 안 봤어?"


나는 내심 들키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 먹었다.


"안 봤어요. 진짜에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아빠는 여동생한테 물었다.


"자, 그럼 니가 말해봐. 티비 봤어 안 봤어?"


그리고 그 때부터 상황은 나에게 최악으로 흘러갔다.


"사실 봤어요. 잘못했어요"


하며 여동생은 양심(?)고백을 했다.(아놔. 지금도 욕이..)

그와 동시에 겁이 난 남동생도 


"저도 봤어요. 잘못했어요"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피가 거꾸로 머리로 확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모범을 보여야할 첫째가 어린 동생들만도 못하다며

대역죄인이 되어 모든 죄를 뒤집어 썼다.


인생 최초로 경험한 배신과 치욕의 순간이었다.



오늘 커피숍에서


 아이들 하원길에 만난 아는 엄마들과 커피숍에서 잠깐 커피를 마셨다.

심심한 아이들에게 한 엄마가 핸드폰으로 '파워레인져' 동영상을 틀어줬다.

푹 빠져서 보는 우리 애들을 보면서 나는 애들한테 TV를 잘 안보여준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선배(?)엄마가 자꾸 안 보여주려고 하면 아이들이 더 보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들은 올레TV가 나오는 할아버지네 집에서 내내 티비만 보긴한다.)


아직 뜨거운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내 어릴 적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이 맞다.

안 보여주려고 하면 더 보려고 하는거.


진짜 맞는 말이다.







+


그래도 현이 진이와 함께 있을 때 티비를 틀고 싶지 않다.

아직은 어린 6살, 4살 아이와

티비보다 얼굴을 서로 마주하고 싶은 건

온전히 내 욕심인 걸까?




++


역사는 이렇게

되물림 되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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