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9.
내가 안 믿는 말
누가 하는 소리 중 절대 안 믿는 말이 몇 개가 있다.
'전 물만 마셔도 살이 쩌요' (야, 그럼 아프리카 애들은 다 비만이겠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저기, 대체 내가 몇 번째 '너'인지...?)
그리고 진짜 안 믿는 말.
'전 남자 얼굴 안 봐요'
한 때 내가 이 말을 많이 하고 다녔다. 어쩌면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잔뜩 담긴 이야기로 세뇌를 당해서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모님이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며 남자는 능력을 봐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를 해서인지도. 어찌 되었든 나는 좀 배운 신여성답게 '얼굴 따위가 중요해?'라고 시크하게 친구들에게 내밷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내가 깨달을 게 하나 있다면, 그건 그냥 정말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잘생긴 얼굴을 밝히는 여자였다. 이 사실을 깨달기 까지 35년이나 걸렸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와 실제의 '나'와는 매번 괴리감이 존재했다. 남자 얼굴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가장 열을 올리던 고등학교 시절에 HOT 멤버 중 '강타'를 가장 좋아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슈퍼스타 K, '허각'과 '존박'의 대결에서도 나는 잘 생긴 '존 박'을 응원하게 위해 문자투표에 참여했다. 존박은커녕 문자 집계하는 아르바이트생들조차 보지도 않을 문자에 잔뜩 응원 문구를 써서 말이다.
'2번. 존박. 목소리 얼굴 진짜 다 정말 멋져요!'
난 그저 그런데
지난달에 신랑이 차 SD카드에 노래 파일을 잔뜩 업데이트했다. 시댁에 가는 길에 들으려고 기특하게도 미리 준비한 모양이었는데, 내가 요즘 꽂힌 Lasse Lihnd의 곡도 들렸지만 대부분은 처음 듣는 노래였다. 노래를 무심하게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신랑이 말했다.
"난 이 노래 좋더라"
흑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전혀 힘 안 들이고 마치 중얼거리듯 노래는 시작한다. 랩을 잘하는 흑인이 몸을 슬쩍슬쩍 튕기며 시건방지게 부를 것 같은 멜로디. 내가 대답했다.
"난 그저 그런데?"
그리고 몇 주 지났을까 신랑이 한번 더 말했다.
"여보, 이거 뮤직 비디오 한번 봐봐. 느낌 있어"
알았다고 성의 없게 말한 뒤 유튜브에서 노래 제목을 찍고 플레이.
그리고...
오. 마이. 갓.
야구잠바를 입은 미소년.
화장기 하나 없는 새로초롬한 소년이 서있다.
몸을 튕기며 춤을 추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다.
같이 춤을 추는 친구들도 하나같이 세련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냥 동네 애들 느낌.
하지만 공기의 색은 파스텔톤을 띄며 달달하게 연출되며 몽환적이다.
게이 팬층도 잡아보려는지 남자와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기도 한다.
이 가수의 이름은 '트로이 시반',
그의 노래 'YOUTH'를 소개한다.
뮤직 비디오를 보고 난 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엔돌핀이 돋아난다.
겨우 '뮤직비디오'를 봤을 뿐이지만,
빼꼬롬하게 잘 생긴 트로이군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부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괜히 찌릿찌릿해진다.
(여보 미안. 그래도 여보뿐이야)
같은 음악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귀로 들었는데,
어찌 이렇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지.
요즘 들어 부쩍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많아졌지만,
나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가수의 외모가 그래도 중요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