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4.
최근 책 두어 권을 읽고 찝찝해졌다.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책을 두어 권 빌려서 연달아 읽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하자는 건지도 당최 이해가 안 갔다. 정말이지 이럴 때는 저 멀리 우주 속 블랙홀로 강제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심지어 책 말미에 유명 대학 국문과 교수님들이 이 작품에 대한 찬사를 줄줄이 늘어놓은 부록을 읽으면 어쩐지 약 오르는 기분마저 든다. 이건 필시 무식해서 생기는 열등감이거나 아니면 투자한 시간 대비 유희를 즐기지 못한 억울함도 있을 터,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나 무식합니다'라고 티를 내는 것 같아 쓰면서도 슬쩍 서글퍼진다.
저녁때 신랑한테 슬쩍 물었다.
"여보, 주변 사람들이 엄청 재밌다고 추천해서 읽어봤는데, 하나도 재미없으면 어때?"
그러자 오래간만에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신랑의 대답.
"소외감 느끼지"
소외감이라.
그렇다. 그 유명한 책을 읽고 김 빠진 콜라를 마신 듯한 기분이 든 이유. 그중 하나는 아마도 소외감이 맞다. 고명하신 문학의 권위자들로부터 무척 소외된 듯한 기분. 다들 '오호라~제법이군' 하며 무릎을 탁 치는 와중에 나 혼자 눈을 꿈뻑꿈뻑거리며 '뭔 소리여' 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꼴이라니. 그러고 보니 내 기분이 찝찝해진 이유에는 그 소외감이 크다. 남들이 다 웃고 있을 때 혼자 못 웃는다는 건 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소외감으로부터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친구 없는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필사적으로 친구를 만들기 위해 매달린 다기보다는 그저 나와 잘 어울릴만한 그 누군가를 탐색하는 것. 그건 '노력'이라기보다는 그저 '본능'에 가까웠다.
최근에 아이들 일기장을 읽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날 일기 주제가 '내가 친구에게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여학생 중 한 명이 소개한 방법 중 하나를 읽고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 여학생이 소상히 쓴 방법은 바로 "화장실 같이 갈래?"였다. 세상에... '동서'까지는 몰라도 '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우정법은 여전했다. 어슴푸레한 기억 저편으로 내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돼서 친구와 화장실을 갔던 기억. 일단 같이 화장실까지는 같이 갔었는데... 우리는 (아니면 나만) 서로 조금 망설였다. 화장실 칸에 같이 들어가서 일을 봐야 하는지, 아니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문 밖에 세워두고 내 볼일을 봐야 하는지. 결론만 얘기하자면 나는 그 친구와 그 좁은 화장실 칸에 둘이 들어가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그 은밀한 일을 해냈다. 물론 어색할까 끊임없이 수다를 떨면서. 그렇게 그 아이와 나는 모종의 동료애를 느꼈던 것일까.
소외감이 비단 인간관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비열'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낯선 감정. 어떤 물건을 1도 올리기 위해서 소모되는 열량을 뜻하는 '비열'. 비열을 이용한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내가 소외감을 느꼈던 것은 나는 이 만큼도 관심도 없는 현상에 누군가는 그토록 골몰하여 '비열'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이 것이 우리가 배우는 과학 교과서까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얼마나 중요했으면...) 교과서에 나왔으니까, 시험에 나오니까, 수능에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읽어야 했던 그 많은 교과서와 책들은 나를 외롭게 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을까.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가서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든다. 굉장히 맘에 드는 전시회라면 마음이 충만해지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을 보고 나오면 머리가 흐리멍덩해지고 만다. 몇십 년을 그 분야에서 외길을 걸어온 작가의 그 깊은 세계를 단 번에 이해를 할 수 없을 거다. 그래도 '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소외감과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를 느끼고 싶다는 욕심이 충돌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20 때보다 전시회나 미술관에 그렇게 열광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점은 자신의 스타일을 좀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 맞지 않으면 어느 정도 포기도 할 줄도 안다. 억지로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볼 시험도 없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저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어릴 적에는 (지금도 누군가에는 어리지만) 필독 도서를 언젠가는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또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 하루를 알차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 당시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라는 류의 자기계발서가 한참 유행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기에 여러 번 시도를 해보고 계속 실패했다. 나는 태생이'올빼미'였다. 반평생을 시험기간에 새벽 1시까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었는데 아침형 인간이 못되나 봐를 탓하다니. 지금은 그냥 나는 '올빼미야'라고 그냥 시인하고 산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솔직해진다. '사람'에 관해서는 특히 그렇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게 된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든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히 도 노력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엔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만다. 애 둘이나 낳은 아줌마가 되어 뻔뻔해진 면도 있지만 사실은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함이라고 믿고 있다.
그저 덤덤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단 숱한 시도와 시행착오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무척 쉬워진다. 어디에서 '소외감'을 느낄까 봐 두려워하기보다 그 '소외감'을 적당히 해석해서 꿀꺽 삼킬 수 있다.
나랑 좀 안 맞는 사람인가 봐...
내 취향의 책이 아닌가 봐...
그건 내가 좋아하는 전시회가 아니야...
내 능력 밖이야.
굉장히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위의 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살면서 무척 힘이 된다. 그저 내가 이런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리 위축되지도 소외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사실 내가 남과 다른 것은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당연히 다르니까. 쇼펜 하우어도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남과 같아지기 위해서 허비하고 있다고...
어째 쓰고 보니 어려운 책 두 권을 제대로 못 읽은 실패감에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놓은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애정 하는 작가님의 수상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최근 '김애란'님의 '바깥은 여름'이 2017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관련한 기사를 읽다 활짝 웃어버렸다.
바로 '함께 나누고픈 문장들'에서였다.
그 기사에서 내가 너무 좋아서 외웠던 구절이 나왔다.
아, 누군지도 모르는 그 기자와
어쩐지 통하는 이 짜릿한 기분이라니.
그러고 보니 남과 다른 것을 인정하자고 해놓고서도
남과 같았을 때 여전히 동질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아무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
그 구절은 이러하다.
침몰하는 배안에서 소년가장이었던 학생을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배로 들어갔다 죽은 남편을 생각하는 아내의 내레이션.
"어쩌면 그 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