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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Oct 08. 2018

머리를 염색했다.

2018.10.8.



뿌리 부분은 빼고,
갈색 부분만 염색 가능할까요?


 한 동안 거울을 볼 때 그것만 보였다. 내 투 톤 머리. 두피를 기점으로 15센티는 검은색, 나머지는 얼룩덜룩한 갈색. 그동안 해온 파마와 염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작년 말 모발 기증을 결심한 이후로, 그동안 머리 염색 및 파마를 자제해왔다. 주위 사람들은 (그래 봤자 신랑임) '차라리 돈으로 기부해'하며 미련 떨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뿌리 염색 안 하냐고 물어보는 지인들도 가끔 있었다. 그건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나와 잘 아는 사람에게는 '아 그게 내가 모발 기증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거든'이라고 말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 그러게....' 하며 말끝을 흐렸는데, 그건 내가 혹시나 상대방이 '와, 이 사람.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뭐 기부하려고 이리 궁상을 떠는 사람이었어?'라고 행여 생각할까 봐였다. (나란 사람 참 생각이 많고 남의 시선 엄청 신경 쓰는 사람)


어찌 되었든 그렇게 1년 남짓 버텨온 내 투톤 머리가 추석 전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단번에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머리를 빗을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양치질을 할 때, 어느 유리창에 내 실루엣을 볼 때 조차도, 그저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내 흩날리는 머리털이 보였다. 머리 색만 어떻게 정리되면 내가 지금보다 최소 두배는 더 예뻐질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쓰면서도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아 어쩐지 민망)  


 

퇴근길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둔 바로 전 날. 예전에 아들 머리를 한번 깎았던 동네 미용실이 보였다. 유리 안으로 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던 친절했던 언니가 보였다. 종업원 없이 혼자 꾸려나가는 작은 미용실이었지만  지나갈 때 보면 항상 바빠 보였다. 그날도 어떤 아저씨가 이발 중. 나는 문을 반쯤 열었다.


"뿌리 부분은 그냥 두고, 갈색 부분만 염색이 안 될까요?"


하고 묻자  미용실 언니가 나에게 되물었다.


"왜요?"


나는 숙제를 안 해온 학생이 변명을 늘어놓은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했다.

그러자 미용실 언니의 의외의 대답.


"기부하려면, 염색을 아예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내 안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중이었건만, 미용실 언니까지 만류를 하시니 갑자기 머리가 어찔해졌다. 그리고 불현듯 이 미용실 이름이 '샬롬 헤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신앙이 깊으신 미용사분은 그 선한 눈빛으로 나에게 착한 일을 마저 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묻고 있었다. 아오. 이걸 어쩐다. 나는 손님이 아닌 '한 여자'로서 이 지저분한 투톤 머리가 얼마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좀 더 어필했다. (한 여자가 있어... 날 너무 사랑한... 갑자기 김종국 노래가 생각이) 이번에 검정으로 하면 영원히 염색 따위는 안 할 거라는 또 지키기 힘든 공허한 다짐을 남발하면서.


"그럼 하세요, 손님. 다시 기르면 되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염색을 하기로 결정했고 지금은 완전히 흑발이다. 머리털 나고 검은색으로 염색은 처음 해봤다. '다크 브라운'이라고 두세 번 거듭 강조했던 미용사 언니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 머리는  칠흑같이 검은 흑발이 되었다. 염색을 마치고 나니 마치 체한 것이가라앉는 것처럼 굉장히 개운해졌다. 그리고 주위 사람 아무도 인정 안해주겠지만 내 눈에는 훨씬 더 얼굴이 나아보였다. 털정리 안 되고 못먹어 삐쩍 마른 '요크셔테리어'에서 윤기가 좔좔나는 '검은 고양이 네로'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추석 연휴에 요즘 유행하는 호피무늬 치마를 하나 샀는데, 그게 흑발과 잘 어울려서 흡족했다.


문제는 자책감
그리고 방탄소년단의 유엔총회 연설


문제는 그 만족감 이면에 잔잔하게 깔린 '죄책감' 이었다. 거울을 볼 때 이미지가 단정해졌다라고 좋아하면서도 문득 문득 지레 찔렸다. 의식의 흐름은 대충 이러했다.


'나 의지 박약인가. 1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무슨 변덕이야. 그냥 두었으면 건강한 모발이 15센치나 되었을 텐데.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곧 죽어도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이래서 내가 머를 해내겠나. 이렇게 포기가 쉬워서야. 쯧쯧'


자학 아닌 자학모드가 되어 거울을 보며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추석 연휴 마지막 날,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유튜브로 방탄소년단 관련 영상을 보고있었다.(거듭 밝히지만 나는 '아미'다') 그날은 UN 총회에서 방탄소년단이 연설을 하던 날이었다. 그리고 남준의 연설은 굉장히 감명깊었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방탄소년단의 기존 곡들의 메세지와 일맥상통했던지라 좋았다. 한 5번 정도를 다시보기를 하고 있었는데 유독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Like most people, I've made many and plenty mistakes in my life. I have many faults, and I have many more fears, but I'm gonna embrace myself as hard as I can, and I'm starting to love myself gradually just little by little.'


(많은 사람처럼 저는 제 인생에서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저 자신을 북돋고 있습니다. 조금씩 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내 상황과 꼭 맞는 말이란 말이냐.' 하며 끄덕 끄덕 연설문을 곱씹었다.


이렇게,


'단점이 있지 나에게도...

의지박약. (또르륵)

두려움도 있지...

의지박약이라 내가 꿈꾸는 것을 못해낼까봐.

하지만 그래.

할 수 있는 만큼 내 자신을 북돋자.

까짓거 모발기증.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지.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면 되는거 아니겠어?

너무 서두를 것 없이 언젠가 하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냥 천천히 기다리자.'


혼자 스스로 토닥토닥을 하고나니

어쩐지 힘이 났다. 정말 사람 별거 없다.

생각의 한 끝차이로 기분이 왔다갔다 한다.


나의 합리화에 대한
합리화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 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하지만 가끔은 그럴 필요 없는 것에도 힘들어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시기도 있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자책감이 빠져있기도 한다. 어이없이 아들 준비물을 빠트렸다던가,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너무 심하게 혼내켜서 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던가할 때 등등. 그런 일은 수도없이 많다. 평소에는 괜찮다가 어느 날인가는  '아, 진짜 나 왜 이러는거야. 별 것도 아닌데 버럭해서 애는 왜 울려.' 하며 스스로가 싫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기분은 더 굴을 파고 들어가게 되고 하루 기분이 좀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정말 약이 없다. 그냥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 밖엔. 깜냥이 여기까지 밖에 안되지만, 내가 정말 싫지만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하며 합리화를 해줘야 한다. 다음엔 준비물 잘 챙기면 되지. 다음엔 좀 덜 화내면 되지. (그리고 아까 진이가 한 행동은 혼날만 했잖아. 그 꼴을 두고 내 성미에 어떻게 그냥 넘어가) 하면서 합리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또 하루가 살아지는 거고

그렇게 하다보면 어제보다는

오늘이 좀 나아지는 거다.


그러다 또 버럭할지언정.




+

참, 내가 너무 싫어 사라지고 싶은 날엔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을 들으며

차를 한잔 마셔보기를 추천한다.


이번 계기로 방탄소년단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된건

나로선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

지민아, 누나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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