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11.
드라이 플랜트, 로즈마리.
로즈마리를 키운 적이 있다. 고기 요리에 싱그러운 초록 허브를 화룡점정으로 '또옥~' 올려보고 싶었다. 겨울 끝자락에 그런 충동을 느꼈는데, 안타깝게도 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화분 집에서 봤던 로즈마리는 기대와 달리 싱그러움과는 거리가 먼 겨울나무 같은 인상이었다. 카페 앞치마를 두른 화분 집 사장님은 봄에서 여름 넘어갈 즘에 로즈마리가 잘 자란다고 했다. (그건 로즈마리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말이었음을 그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싱싱한 상추 같은 로즈마리를 사러 갔으나 결국 방금 티백에 넣어 우려도 손색없을 듯한 색을 지닌 녀석 중 그나마 나아 보이는 녀석으로 골라왔다. 그리고 '고명'이라는 역할을 하기엔 애초에 낯빛이 어두웠던 로즈마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간택되지 못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라 함은 고기를 굽고 있던그 집 안 주인이 무표정하고 아주 살짝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 잠깐을 말한다. 관심 밖으로 나간 로즈마리는 점점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집안의 '배경'이 되어갔다. 한 번은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는데 내가 다른 물건을 치우다 슬쩍 건든 로즈마리에서 갑자기 우수수 눈이 내리듯, 작은 잎들이 한꺼번에 정말 말 그대로 '우수수' 왕창 떨어졌기 때문이다. 죄책감인지 자책감인지 모를 복합적으로 씁쓸한 기분으로 그때 내심 생각했다. '화분은 이제 키우지 말자.'
인생이 항상 그렇듯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말이지 인생은 복잡하고 여러 가지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집에는 화분이 8개나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역시 화분을 기르는 즐거움이 아닌 역시 또 다른 욕망의 결과였다. 그 욕망 또한 지난번 요리에 고명을 얹어보고 싶다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는데, 집안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인테리어 소품과 비슷한 맥락에서 화분을 들인 것이었다. 처음부터 8개의 화분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내가 똥손 중에 똥손임을 이미 몸소 깨달은 바, 양심상 거실에 하나 놓을 화분을 친정집에서 가져온 것이 시작이었다. 얼마 후 집 분위기상 화분이 몇 개 더 필요할 것 같다며 친정 부모님이 거의 욱여넣은 대형 화분이 2개. 본의 아니게 우리 집 애들보다 키가 더 큰 화분이 3개나 있다.
그러다 우연히 잡지에서 풍수지리 정보를 보았다. 현관에 물을 놓으면 돈이 들어온다 했다. 안 그래도 이사 후 심심한 현관 인테리어에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마음에 불을 지폈고, 물을 머금은 게 뭐가 있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식당 입구에 심심치 않게 있던 어항이나 분수는 나는 몰랐지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검색을 해나갔다.(돈 쓸 궁리엔 신속하게 빨리지는 검색 속도와 고도의 집중력) 그러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엉뚱하게도 '수경 식물'이었다. 볼록한 작은 어항 물속에 부끄럽고 도도하게 허연 뿌리를 드러낸 자태는 우아하다 못해 그 자체만으로 'KINLOCK' 잡지의 분위기와 어느 부분은 교집합을 이루는 뭔가가 있었다. 현관에 3개를 놓기로 하고 내친김에 부엌에도 생기를 불어넣어보자는 작정으로 3개를 더 들였다. 그리고 수경식물이 도착한 날 나는 망연자실 비슷한 심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수경식물 키우는 요령에 '2주에 한 번은 꼭 수경 화분의 돌을 깨끗이 닦고 물을 갈아주세요. 단 물은 방금 받은 수돗물보다 하루 정도 받아두었던 물로 넣어주시길 권장합니다'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나는 무겁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안 곳곳에 수경식물을 배치했다.
화분을 들인 이유가 인테리어든 풍수 지리든 간에 이번엔 또 하나의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그 욕망이라 함은 바로 이번만큼은 잘 키워보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로즈마리를 그렇게 처참하게 보내고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보기로, 그리고 이번에도 잘 못 키워내면 난 정말 화분에서 만큼은 구제불능이라고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 필사적으로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수경식물을 들인 것이 지난여름이었고 긴 겨울을 지난 지금 우리 집 화분의 근황을 말하자면, 죽지 않고 다행히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그중 하나는 이번에 꽃 봉오리가 올라와서 큰 감동을 주었다. 뭘 키우든 꽃이니 열매니 뭐든 기름지게 키워내는 우리 친정아빠 같은 사람이야 그려려니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 같은 (살아있는 화분을 드라이플라워가 아닌 드라이 플랜트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이번 화분의 꽃봉오리는 어떤 위로와 격려(그래 네가 그렇게 형편없는 똥손은 아닌..) 같은 것이었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
살아있는 것을 키운다는 것은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이 영역은 공부를 하거나 시험에 합격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분야다. 시험 준비를 할 때에는 치고 나가는 열정 비슷한 게 있어야 한다면 이 분야에서는 어떤 힘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은 자잘한고 잔잔한 관심이 꾸준히 필요하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도 적게 줘서도 안된다 하는 말은 참으로 어렵다. 라면 한 봉지에는 550ml 물이 정확히 들어가는 것처럼 화분 크기에 따라 딱 정해진 물주는 양이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키워본 결과 그런 것은 없다. 화분 크기가 같아도 그 화분에게 큰 잎이 많다면 물을 똑같이 줘도 부족해서 금방 시들해진다. 정말 화분마다 각개 각색의 특징이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가만히 관찰을 해봐야 한다. 그 반응도 대단히 느려서 하루 정도 기다렸다 다음 날 유심히 봐야 '아, 잎이 살짝 뺑뺑해졌나?'라고 느낄 정도다. 누구는 화분에 스프레이를 뿌리면 더 건조해진다고 하고, 누구는 건조한 곳에서는 자주 뿌려줘야 잎끝이 안 마른다 하니 정답은 아직도 모르겠다. (써 놓고 보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겨우 아는 것 하나라고는 관심을 갖고 뭐가 맞는지 잘 찾아서 이리저리 보살펴줘야 한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보살펴 주는 과정이 귀찮다기보다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분 키우는 것도 생명을 키우는 일이라 아이를 키우는 일과 비슷하다. 맛있는 요리 해주고 좋아하면 힘들어도 힘이 나는 그런 심리랄까. 내 몸뚱이 하나 챙기기도 어려워서 결혼을 기피한다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집 장만이 너무 어려워서,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아이를 낳기가 어렵다는 기사도 종종 접한다.(사실 나도 그런 시절이 잠깐 있긴 했다) 근데 생명을 책임지고 키운다는 것은 내가 먹을 사탕 10개에서 3개를 양보해서 나눠주는 개념이 아니다. 식물을 키우고 더 나아가 내 자식을 책임진다는 것은 내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건 마치 길 잃은 눈 길에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등에 엎고 가다가 서로의 체온을 유지해서 둘 다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 없던 시절에 오히려 자식을 많이 낳아 키웠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출산정책이나 피임이 제대로 안 된 탓도 있었겠고 농사에 노동력이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아이를 낳아서 책임감을 느끼고 먹이고 입히는 과정에서 내일 새벽 밭에 나가야 하는 원초적인 이유와 에너지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식상한 결론이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작과 끝일 수밖에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니까.
똥손에서 금손으로
스파티필름을 꽃봉오리를 보고 잔뜩 흥분해서 써 내려갔는데
정말 인생은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나 같은 똥손이 화분 꽃을 피우다니 말이다.
이런 것 하나로 잔뜩 자신감을 집어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 나이 '마흔'에 아직 갈길이 참 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는 마흔에 '불혹'이라며 그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건만
나는 화초 하나 처음 꽃 피워놓고 봄 화분을 들여볼까 궁리를 하고.
+
내친김에 우리 집 화분 자랑.
수경식물들.
++
그래서 올봄엔
로즈마리나 다시 한번 키워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