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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Jun 02. 2016

살림의 고수 따라 하기

2016. 6. 1



문명의 은총 ,세탁기

                                        

  요즘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고, 책도 읽는 시대가 되었다만, 아줌마로서 과학이 이룬 위대한 발명은 '세탁기'라고 생각한다. 전화 통화 안 돼서 답답하면 찾아가면 된다. 기차나 비행기가 없으면 멀리 이동안 하고 동네에서만 살면 된다. 컴퓨터가 없으면 불편은 했겠지만 종이와 펜으로 많은 것을 해결했을 것이다. 밥솥이 없으면 냄비에다 하면 되고, 티브이가 없으면 책을 읽으면 되고, CD가 없으면 레코드로 듣고, 레코드가 없으면 직접 공연을 보러 가면 된다.


  하. 지. 만.  세탁기가 없으면 그냥 손으로 해야 된다. 그리고 그 엄청난 빨래는 여자가 다 해야 된다. 무더운 여름, 귀찮다고 빨래를 며칠 미루면 곰팡이가 필 것이고 그 곰팡이로 인해 남편은 부인에게 한마디 할 것이며, 부인은 떨리는 손목을 내보이며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며 서럽게 울 것이고, 그러면 열 받은 남편이 투덜거리며 까짓것 내가 한다고 몇 날을 손빨래를 하다가 결국 이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며 허리에 핫팩을 하고 있는 부인을 끌어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부인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부인, 부인이 바르던 그 습진 연고 어디다 두었소?"


  세탁기가 없는 세상은 정말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그 옛날 빨래터는 아낙들이 남편 흉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던 공간이었다고 참 정겹게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방망이로 두드리고, 물에 헹구고, 또 두드리고, 헹구고. '퍽! 퍽! 퍽! 어휴! 잠방 잠방. 퍽! 퍽! 내 팔자야.'  


 문명의 은총을 받은 나의 세탁 과정은 무척 간단하다, 끈적끈적한 옷을 통돌이에 넣고 세제 한 스푼 깎아서 솔솔 뿌린 후 뚜껑만 잘 닫으면 된다. 그다음부턴 세탁기가 알아서 처리해준다. 부지런한 동네 엄마들은 남편이 좋아하는 칼라티 나 소재가 좋은 옷들은 손빨래를 한다던데, 나는 그런 섬세한 녀석들의 사정 따위 봐줄 리 없다. 세탁기에 못 돌리는 옷은 애초에 안 사는 게 답이다.




    살림의 고수 따라 사기        

                           

   동네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나와 마음이 아주 잘 통하는 친구가 있다. 문제는 그분이 살림을 무척 똑 부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문제) 네이버 리빙 앤 푸드 메인에 다섯 차례나 살림 아이디어가 오른 야무진 블로거이다. 처음 저녁 초대를 받아 집을 가보았더니, 현관 냄새부터 향긋하다. 먼지 하나 없는 방바닥은 뭉실뭉실한 먼지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우리 집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시에 신랑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을 때라고 변명을 해봅니다만) 장난감은 모두 제자리에 있고 창가에 놓인 귀여운 화분은 흙도 촉촉하니 상태가 싱싱해 보였다. 그 집에서 좀 있다 우리 집에 돌아오면 가뭄으로 퍼석퍼석하게 갈라진 땅이 매번 떠오르곤 했다. 몸은 항상 피곤하고 시간도 없는데 살림의 고수를 자주 만나면서 자극만 엄청 받았다. (우리의 아들이 같은 유치원 다녀서 하원 시 매일 봄) 그러다 결국 내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무조건 따라 하고 보자'였다.

     

  어느 날 고수가 귀여운 가방을 들고 나와 집에서 만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만드냐고 묻자 재봉틀로 그냥 몇 번 드르륵 박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절한 고수는 재봉틀은 매우 쉬우니 하나쯤 집에 두고 쓰면 후회 안 할 것이란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결국 샀다. (미처 고수임을 깨닫지 못 했을 때 저지른 실수) 지금 그 재봉틀은 첫날밤을 치르고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매일 밤 나를 바라보고 있다.  (미안하다. 미안해... 주인 잘못 만나서)


  그다음 따라 산 물건은 '레고 수납장'이다. 그 집 아들이 레고를 참 잘 만드는데 그 배경에는 엄마의 남다른 교육관과 노력이 있다. 하지만 매일 레고 피스를 분류하고 청소하는 부지런함은 생각지도 못한 채 나도 똑같은 수납장을 구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레고가 뒤죽박죽 섞여있다.(그래도 대략 만족한다. 이만한 레고 정리 방법은 아직 못 찾았다)


 세 번째 물건은 '물걸레 청소기'이다. 이건 정말 효자 상품인데, 고수는 검색 끝에 찾아낸 최고의 물걸레 청소기를 핫딜로 구입하며, 나에게 쇼핑몰 사이트 주소를 카톡을 보내주는 인정을 베풀었다. 물걸레 청소기의 성능과 효용성은 정말 대박 중에 대박이다. 첫 물걸레 청소기 사용 후 생전 처음 느껴보는 반질반질한 바닥을 만졌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헐. 그동안 내가 한 걸레질은 대체 뭐였나.'


    물걸레 청소기를 쓰면서 가전제품에 대한 욕심이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낮에는 신랑 일을 도와주느라 밖에 나가 있는 나로서는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얼마 전 여동생 집에서 새 거나 다름없는 식기세척기를 가져왔다. 새로 이사 간 집의 부엌이 좁아 놓을 공간이 없다는 아주 고마운 이유 덕분이었다.


   그. 리. 고. 그렇게.... '신세계'는 열렸다. 아침에 먹은 식기들은 대충 물에 담가놓고 저녁때 밥을 해 먹고 나온 식기들까지 모아서 세척기를 돌린다. 예전에 저녁 식사 준비 전에 쌓아놓은 아침 설거지를 마저 하고, 저녁 먹고 다시 설거지를 20분 정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략 1시간은 절약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시간에 짬을 내어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밀린 공과금을 낼 수도 있다. '손빨래는 안 하면서 내가 왜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손 설거지를 했왔는가'에 대해 통탄을 하면서, 지금이라도 세척기를 사용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를 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 살림의 고수가 얼마 전에 산 빨래 건조기가 탐나기 시작했다. 건조도 잘 되지만 이미 마른 이불을 조금만 돌리면 먼지통에 먼지가 수북이 나온다고 한다. 요즘 미세먼지가 난리라 이불도 정말 맨날 털고 싶은데, 어깨가 빠질 것 같아 자주 못하는 나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고가라서 망설이다가 세척기를 사용하면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신랑에게 틈틈히 건조기를 사야 햐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하게 전달했다. 거의 3주 동안 건조기 얘기를 잊을만하면 꺼내는 나에게 신랑은 그렇게 필요하면 사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바로 결제까지 마무리.  정말 설렌다.



우리는 서로 지름신을 부르는 사이             

                      

난 여전히 살림의 고수를 만나면 따라 살 것이 없는지 염탐을 한다.  

그런데 살림의 고수가 얼마 전 하는 말.


"우리 신랑이 oo 엄마(나를 뜻함)가 뭐 사게 만든다기에, 그 집은 건조기 자리 봐놨다 이랬어요"


 알고 보니 살림의 고수는 신랑에게 내 얘기를 하며 '식기세척기'의 구입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맨날 같은 물건을 따라서 산 나로서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잘하게 우리는 뭔가를 서로 사게 만들고 같이 사기도 했다. 그 집 신랑에게 내가 지름신을 부르는 여자로 보일까 소심한 마음에 조금 걱정도 되었다. 사실 따라 산 건 내가 더 많은데...


오후에 유치원 앞에서 살림의 고수를 만났다.

식기세척기가 도착해서 써보니 정말 만족스럽다며 무척 좋아한다.

나도 방금 빨래 건조기를 주문했다고 선생님께 숙제 검사 맡 듯이 자랑했다.

(고수가 쓰는 LG 트롬 똑같은 모델 구입했음)   


고수가 물었다.    

"저기... 김치냉장고 잘 써요? 어때요?


"네?"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김치냉장고를 또 사려는 건가? 내가 지금 괜찮다고 하면 또 살 수 있는 여잔데. 식기세척기에 이어 김치냉장고까지 또 지르면 그 집 신

랑이 나 진짜 싫어하겠다. 그럼 김치냉장고는 쓸데없다고 해야 되나?


"음....(침 한번 꿀꺽) 김치냉장고... 왜요? 사게요?"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살림의 고수는 나를 한번 슬쩍 보더니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건조기 놀데 있는지 물어본 거예요.

 필요 없으면 김치냉장고 그냥 처분하라고.

 세탁실 자리 진짜 좁잖아요"


휴...  

정말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집 건조기 놓을 자리도 벌써 견적 내고,

역시 살림의 고수는 다르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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