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나무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문학과지성,1983)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나를 그대는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나지 않는 그대의 얼굴, 다만 오랫동안 서가의 책들을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들만이 내 기억에 남아 그대를 지킬 수도, 어느 날 환한 햇살을 안고 선 검은 머리카락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던 그의 머리카락만을 기억할 수도 있다. 기억은 내가 안고 싶은 것도 손에 쥐고 언제나 매만지고 싶은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런 제멋대로의 기억이 그리움으로 치환되면 그것은 한없이 얇은 구름 한 장 위에 발을 내딛는 것과 다름 아니다. 저 넓고 깊은 슬픔의 낭하로 언제든 떨어질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다는 것. 향기, 바람, 냄새, 바람을 따라 떠도는 이런 종류의 기억은 더더욱 그 슬픔의 깊이를 더한다. 라일락 꽃향기, 담배 향기, 그리고 그 냄새를 따라 오는 소리들, 그리고 눈 감고 코를 열고 귀를 열고 바람에 나를 맏긴다. 그런 슬픔이다, 그대는. 남아 있어도 바람을 따라 사라질 그런 기억을 부여잡는 어느 봄날의 일기 같은.